[요 14:1-14] 근심과 기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근심’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심령이 괴로우셨을 때 [13:21], 십자가의 길을 놓고 마음이 괴로우셨을 때 [12:27],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에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을 때 [11:33] 사용된 단어다.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뜻을 밝히 드러내셨데도 우리는 모른다고 한다. 아니 내뜻과 다르면 외면한다.
도마가 그랬다. “내가 어디로 가는 지 그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라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밝히셨지만 도마는 모른다고 한다. 자신으로서는 그 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한자리 하고자 했던 욕심과 다른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길을 외면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한번 천명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길은 세상 임금이 되는 길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빌립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를 (성부 하나님을)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한다.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심은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의 충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순종시키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이구절은 “내 이름으로 누구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헬라어 ‘무엇이든지’는 ‘누구든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니 이 구절을 부적처럼 사용해서는 안된다. 부적처럼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내 욕심이 다르면) 근심하게 된다. **전문가에게 물어본 결과 헬라어 문법상 본문대로 무엇이든지로 (중성으로) 해석해야 한다. 누구든지(남성/여성)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문장의 주어가 ‘너희’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13절도 이렇게 재해석 된다. “성부하나님께서 나를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도록 내가 행할 것이니 너희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도록 하여라.”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자. (누구든지 x 무엇이든지 o)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기도를 마칠 때마다 붙이는 후렴구가 아니다. 나는 기도할 때 지금도 하늘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간구하시는[롬 8:34] 예수님의 기도가 내 기도를 대체하길 원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는 “예수님의 간구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란 뜻이다. 그러니 이 마지막 한구절이 내 간구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