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5:1-17] 포도나무

[요15:1-17] 포도나무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신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신다. 농부의 아들 포도나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예수님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돌봄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하신다.  하물며 우리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5]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가지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돌봄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가르쳐 주신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리시고 – 포도농사를 하시는 분은 제거하다는 단어가 들어주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바닥으로 늘어진) 가지는 열매가 잘 맺도록 들어 올려주시고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열매를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해 주신다. 포도나무에게 농부가 (아버지가) 있듯이 가지 (자녀/아들)도 있다.

제자들에게 ‘아직’인것을 예수님께선 ‘이미’라고 하신다. 아니 ‘아직’은 일/부/러 버리시고 ‘이미’만 취하신다. 예수안에 거하고 열매를 맺어야 깨끗한 가지인데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다고 하신다.[3] 명령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시면서 ‘이미’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선언하신다.[14/5]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은 농부와의 관계 가지와의 관계가 ‘하나같길’ 원하신다. 포도나무가 농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다. 가족공동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말’ (말씀) 이다.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계명이다. 가지에게 전달되어야 할 수액은 바로 이 말씀이요 계명이다. 그것이 열매를 맺는다. 의역에 의역을 거듭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면 수액으로 포도나무를 거쳐 가지에 이르러 그 말씀대로 이루어 진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는 하나님의 뜻가운데 소망하는 것이지 가지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저 가지 개인의 욕심이라면 이루기 전에 밖에 버려진 가지가 되어 땔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을까? 성자가 성부안에 거하는 것을 본받으면 된다. 성자는 성부의 계명을 지켜  성부의 사랑안에 거한다고 하신다.[10]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또 우리의 기쁨이 된다.

서로 사랑하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3] 예수님께서는 말만 떠벌이시는 분이 아니셨다. 곧 십자가에서 이 말씀을 친히 실천해 보이셨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명하는 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14] 그러니 ‘아직’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이미’로 바꾸셨다.

‘아직’을 ‘이미’로 바꾸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셨다. 그래서 역으로 우리가 포도 열매를 맺는 것이다(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열매가 있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농부에 의해 깨끗하게 돌봄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열매를 맺을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공급받을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 이미 7절에서 언급했지만 ‘무엇’은 가지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가 원하는 것, 즉 열매 맺는데 (서로 사랑하는데)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결론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다. 원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할 것도 정해져 있다. 농부( 성부 하나님/아버지)와 포도나무(예수/성자) 그리고 가지들(아들) 을 타고 흐르는 것, 바로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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