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31-42] 성회와 악

[요 19:31-42] 무덤으로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

이사야가 경고한 이 구절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날은 준비일, 즉 안식일 전날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시체를 치워달라고 빌라도에게 부탁하였다. 아직 죽지 않은 예수님 좌우편 사형수들은 다리를 꺾어 내렸고 예수님께서는 이미 절명한 것으로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대신 한 병사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 요한은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부터 죽으시기까지 매 순간 순간이 말씀의 성취, 즉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여러번 반복한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유대인이 두려워 숨어 지내던 제자. 그가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님 시체를 챙겼다. 또 한명 숨어 지내던 (제자) 이스라엘의 관원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다. 이들은 유대인의 장례법에 따라 예수님을 장례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동산 새무덤에 예수님 시체를 두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자 요한의 고백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요한처럼 살았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라고 말은 하면서 살지만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따라 살지는 않는 것 같다. 자기의 목숨을 내놓은 이 두사람, 숨어지내던 제자들의 용기가 부럽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도 유대인들의 관심은 ‘안식일’이었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셨건만 탐욕이 가득한 손으로 ‘주일성수’를 위해 분주한 우리와 무엇이 다르랴.

제자라면 세상의 빛이고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숨어지내는 제자가 있다. 밤에만 찾아온 제자도 있다. 그러나 참 빛은 가려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을 달지 않고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오히려 내가 빛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행동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말씀의 문자적 적용이 아닌 성령의 깨닫게 하심에 따라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음지에서 일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하소서.

yskwon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