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3 주인

시편 83 주인

시편기자는 주변의 여러 나라가 (무려 열 족속이) 이스라엘을 진멸시켜 이름도 다시는 기억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연합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적을 물리쳐 달라고 간구한다.  그러면서 사사시대 때 (왕이 없었던 때)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자신들을 구원했던 역사를 기억한다. 사울이나 다윗왕을 기억하지 않고 왕이 없었던 사사시대를 기억하며 노래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신정을 향한 시편기자의 소원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8]라고 노래를 끝맺는다.

열 족속 연합군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다.[12] 시편기자가 노래한 것은 외환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깨서는 마가복음 12장 1절에서 9절에 ‘포도원 주인’ 비유를 통해 내란을 말씀하셨다. (보통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고 하는데…)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막12:7]

예수님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라들에게 주리라.”로 마친다. (그리고 10-12절 부연 설명이 따른다.)

외환이나 내란 모두 누가 주인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시편기자도 주인은 지존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였고 예수님도 ‘주’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고난중에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별히 교회적 위기가운데 주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인가?  그러나, 오히려 고난의 이유와 교회의 위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은 아닌지? 포도원을 (하나님나라를) 내가 차지하려는 소견때문은 아닌지? 묻고 싶다.

패망직전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러나 결국 패망당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여호와가 지존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가 주인되심을 믿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패망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자리에 없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노래로 부르기만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세상은 알기만 해도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주인에 대한 순종의 의무가 따른다.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시편 82

시편 82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대법관으로 이 세상을 심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하나님, 일어나셔서, 이 세상을 재판하여 주십시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8 새번역] 마치 하나님께서 주무시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께서 세상과 무관하신 분인 것처럼 시편기자는 하소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재판하셨다.[1]

피의자는 신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틀림없다. 신들처럼 군림하는 세상의 권력자, 갑질을 하는 사람들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6] 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오히려 영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된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적용할 수 있다.

그들을 하늘 법정에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고 악인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2] 그들에게 본래 주어진 임무는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 주어라.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3,4] 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를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었다. 그 결과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한마디로 (교회가 무너지니) 사회 기강이 무너진 것이다.[5]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음과 같이 판결하셨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6,7] 한마디로 사형선고다.

그런데 8절에서 시편기자는 다시한번 재판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한번 더 기대보는 것일까? 아니면 사형선고를 받자 본연의 임무를 깨달은 것일까? 그것마저 아니라면 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믿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해 달라는 것일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27 새번역]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신들이라고 불러주시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다.

시편 81

[시81:8]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시81:11]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아삽의 시는 폐망한 이스라엘에게도 소망있음을 노래한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할 때 소망이 있다.

그래서 ‘들으라’, ‘듣기를 원하노라’라고 권면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듣지 아니하며’, ‘원하지 않음’이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것은 유대인의 전통 중 전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처방으로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는 여전히 듣기만 하여서 일까?

[시81:1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시편기자는 ‘들음’에 ‘행함’ ( 내도를 따르라)를 더한다. 예수님도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그런데 여전히 어리석게 산다.

[마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이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시81:15]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듣기만 하는 (어리석은)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나라를 맛볼 수 없다. 제멋에 평생 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아, 말씀을 읽어라.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라. 오늘도 주님의 ‘도’를 따르게 해 달라고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리라.

// 노래하리라. 후배 엠이 ‘ㄱㄷ’를 부탁할 때 ‘노래해 주세요’라고 쓴다. 나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 들으시는 노래가 되면 좋겠다.

시편 80

[시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는 어렵다.

하나님 돌이키소서
얼굴을 비춰주소서
구원하소서

구원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려면 만나야 한다. 만나려면 하나님께 가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만나주시고 구원해 달라고 시편기자는 노래한다.

[시80: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전능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얼굴 빛에는 ‘광채’를 더한다. (돌이키시고와 회복하여 주시고는 히브리 단어로 동일한 듯)

[시80: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만군의 하나님께 있다. 내가 돌이켜서 구원을 받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셔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하소연할 수 밖에 없다. 나 스스로는 돌이킬 수 없는 길. 주님의 빛 없이는 살 수 없는길. 구원은 결국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인데…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어버린 이유가, 멸망이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 제 욕심으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 뜻보다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뜻을 놓지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 회복시켜 주소서
그래야 빛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소서.

[요 21:1-14] 세번째

[요 21:1-14] 세번째

디베랴 호수에 일곱제자가 모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명하셨기 때문이리라. 네명은 어디에?
그러나 먼저 가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늦으신 것일까 제자들은 어부로 돌아갔다. 일곱명중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빌립에게 따졌던 나다나엘도 언급된다.
베드로가 고기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모두 함께 갔지만 밤새 한마리도 못잡았다. 날이 새어갈 때, 아직 어둑어둑 할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으나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물고기를 못잡았다고 하자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하셨다.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잡혔다.
요한이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마치 물위를 걸을 마냥 겉옷을 두른채 바다로 뛰어 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잡은 물고기를 그물채 끌고 배를 타고 육지로 왔다. (잡힌 고기가 너무 많아 배에 올리기에는 배가 작았다.)
예수님께서는 아침으로 떡과 생선을 굽고 계셨다. 방금 잡은 생선도 가져오라고 하자 베드로가 얼른 가져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먹이셨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부활에 대해 물어보지도 못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세번째 만남이었다.
삼세번! 부활의 주님은 여전하셨다. 분명 새로운 육체로 부활하셨건만 제자들과의 만남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과 비교하여 달라지지 않았다. 주님이 달라지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변해야 한다.) 제자들에게 이별연습을 시키시나보다. 승천하시기 전에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기에 시간이 부족할 듯 싶은데… 간간히 나타내신다.
?! 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