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17-27] 자기 십자가

[요 19:17-27] 자기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라고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

골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순간이 (그 순간이 아무리 짧게 지나간다 해도) 온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빌라도! (정녕 사도신경에 이름을 올리고자 했던가?) 그렇게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하려고 했건만 결국은 직접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자리에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십자가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직접 써 붙였다. 히브리, 로마, 헬라 말로 기록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은 명패를 보고 놀랐다.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치라고 부탁하나 빌라도는 자신이 쓸 것을 썼다고 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을 히브리어로 쓰면 네 단어의 첫글자의 조합이 ‘야웨’ 즉 ‘하/나/님/의/ 이/름’이 된다고 한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이라는 명패가 붙은 것이다. 이방인 중의 이방인 빌라도가 알고 썼을리 만무다. 어차피 로마말이나 헬라말로는 그냥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중에 모친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가 서있는 것을 보시고 모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네 어머니라.” 그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5]

내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시편 기자의 노래를 목청껏 불렀던 때가 있었는데…

나에게도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패가 있다. 내가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벌이며 다닌다면 그 누군가가 나에게 ‘가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쳐 쓰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면 주께서 “내가 쓸 것을 썼다” 인정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요 18:39-19:16] 포스트모던의 뿌리

[요 18:39-19:16] 포스트모던의 뿌리

빌라도는 사도신경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길 그렇게 원했을까? 예수님을 무죄라고 생각했음에도 석방하지 못했다. 대신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유월절 ‘특별사면’ 대상자로 제안했다. 그런데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빌라도가 진리의 왕이신 예수를 믿거나 이해했을리 만무다.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한 이유, 즉 로마에 대한 반역을 뜻하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고발자체를 인정하고 말았다.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특별사면하라고 큰 소리로 시위했다.

여론에 휘말려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헤롯이 요한의 목을 베었듯이) 바라바를 특별사면 하였다. 빌라도는 마지막으로 예수를 고문하였다.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왕처럼 입혀놓고 오히려 때렸다. 그렇다고 무죄한 예수님을 어쩔 수 없었다. 빌라도는 마지막까지 무죄를 선고한다.[4] 그리고 예수를 데리고 법원을 나선다.

다시한번 인민재판이 시작되었다. 바라바를 외쳤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다. 빌라도는 로마법으로는 무죄라고 다시 한번 선언하고 무리들에게 너희가 알아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다시한번 예수님은 유대법으로 하면 하나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사형’이지만 (로마법 아래에서) 자신들은 사형시킬 권한이 없다고 항변한다.

빌라도는 다시 예수를 데리고 법원에 들어가 예수를 심문한다. 묵비권을 행사하시는 예수님께 놓아줄 권한이 있으니 협조하라고 한다. 이때 예수님은 잠시 입을 열어 말씀하신다. 놓아줄 권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 줄 방도를 찾으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십자가의 길을 막을 순 없었다. 여론에 밀려 마지 못해 십자가 형을 언도한 것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이었다.

세상법을 따라 살랴 아니면 하나님나라의 법을 따라 살랴.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 알기를 원했다. 그런데 진리를 가르쳐야 할 대표들, 대제사장들조차 진리를부인하고 세상법에 자신들의 문제를 맡기는 상황에서 더 이상 ‘진리’가 설자리는 없었다. 포스트모던의 뿌리다.

// 세상을 향해 진리를 전해야 할 교회도 하나님나라의 법이 아니라 세상 법에만 의존하는 세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교회마저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돈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요 18:28-38] 영원한 나라의 왕

[요 18:28-38] 영원한 나라의 왕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을 끌고 가는 것과 이방인의 법원에 들어가는 것과 어느 것이 깨끗하게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밖으로 나온 이방인 중의 이방인 빌라도를 만나는 것은 더럽히는 일이 아니란 말인가? 하여간 예수님을 법원에 들여보내 놓고, 밖으로 나온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고발한다.

죄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빌라도는 ‘나쁜 놈’이라는 것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법대로 처리하라고 했다. 첫번째 무죄 판결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유대법대로 하면 사/형/수인데 로마법 아래에서 자신들은 그럴 권한이 없다고 항변했다.

법원으로 들어 온 빌라도가 예수님을 신문한다. 대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아마도 로마에 대한 반역의 의미에서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빌라도의 강조점은 ‘유대인’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의 강조점은 ‘왕’이었다. 빌라도는 자신은 유대인이 아닌데 왜 유대 사람의 일에 관여해야 하는 지 물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유대’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왕’ (왕권) 이었다. “내 나라는 이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심지어 유대나라와 구분을 너머 적대시 하셨다.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제서야 빌라도는 촛점을 ‘유대인’에서 ‘왕’으로 옮긴다. 예수님께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묻는다. 예수님은 ‘왕권’을 선언하신다. 이 왕권은 ‘진리’이다. 참된 왕권이다. 세상의 왕권은 왔다가 간다. 우리가 알듯이 역사상 그 어떤 왕조도 오래가지 않았다. (조선 오백년은 역사상 오래 지속된 왕조의 하나이다.) 알렉산더 제국도 심지어 빌라도가 충성한 로마도 영속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왕권은 ‘진리’라고 하신 것이다. 진리는 영원성을 갖는다. 변하지 않는다.

빌라도는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유대인의 왕 예수가 아니라 진리의 왕이신 예수. 참이신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두번째 무죄 판결을 하였다.

하나님나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후로만 따져도 이천년을 흐르는 나라.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신 것을 따지면 창세전부터 이어져 오는 나라. 예수님은 이 하나님나라의 왕이시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왔다가 가는 왕조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왕권을 선언하신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내가 속한 나라다.

내가 믿고 알고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 나라다. 예수님은 이 영원한 나라의 왕이시다.

[요 18:12-27] 제자와 교훈

[요 18:12-27] 그의 제자와 그의 교훈

한사람은 (예수님은) 결박당하여 끌려갔다. 천부장이 직접 나설정도로 중요한 체포작전이었나 보다. 일단은 대제사장의 장인에게 끌고갔다.

다른 한사람은 (베드로는) 예수님이 끌려가신 곳, 대제사장의 (장인) 집에 따라 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다른 제자 한명이 안에 있다가 문지기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때 이 문지기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다. “너도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문지기 여중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온 다른 제자는 자신은 예수의 제자라고 말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베드로는 ㅠㅠ “나는 아니라” 그리고 슬며시 추운 몸을 녹이려 불가로 가서 종들과 불을 쬐었다.

한편에서는 대제사장이 먼저 체포해서 끌고 온 예수님을 심문했다. 심문의 내용은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섬/광/이 스치고 지나간다. 제자들과 교훈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드러낸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 처럼. 제자들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요 듣고 행하는 반석위에 집을 세우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라고 하셨다. 제자가 아닌 자들도 들었다. 듣고 행하지 않으면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관하여는 한마디도 답하지 않으셨다. 오직 자신의 가르침은 공개적이었으니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 굳이 그의 제자들에 대해 따로 답하실 이유가 없으셨다. 제자와 교훈은 동의어다.

그런데 그의 제자 베드로. 불을 함께 쬐던 사람들 (종이나 아랫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물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또 “나는 아니라” 답했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귀를 잘렸던 사람의 친척이 증인으로 등장한다. “네가 예수님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았다.” 베드로는 또한번 부인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삶이어야 한다.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과 (제자와) 배우는 내용 (교훈)은 일치해야 한다. 이것은 동일하게 나의 삶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물론 닭이 울기 전 베드로에게서 제자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항상 백점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낙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고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 이듯 교훈과 (듣는 것과) 제자 (순종하는 것)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그에 따른 언행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가르침만 있고 행함은 없는 교회의 가르치는 사람들을 어찌할꼬. 언행일치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요 15:18-27] 세상이 미워하면

[요 15:18-27] 세상이 미워하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8]

// 얼마나 내가 세상 눈치보면서 살면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는 느낌이 없을까? 나는 예수님 사랑 안이 아니라 세상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일까?

한국 교회가 개독교 소리를 듣는 것은 세상이 예수님을 먼저 미워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택해 주셨는데,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택함을 원한다. 출세나 성공이나 발전이나 모두 세상이 우리를 택하는 가치관을 따라간다. 선생님이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우리는 선의의 경쟁을 운운하며 출세, 성공, 발전을 얘기한다. (청출어람이라도 된 듯 선생님을 가르치려는가?)

솔직히 예수님은 이유없이 미움과 박해를 받으셨다. (만약 우리가 현재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면) 우리도 과연 그런가? 세상도 이미 알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서로 사랑하라’를 실천하지 못하니 미움을 받는 것이지 않은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성령님이 필요하다. 성령님께서 증언하실 것은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예수 믿는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증언해야 한다. 증언은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 증언이 된다. 말이 필요 없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와 동의어에 가깝다. 자꾸만 믿음을 사랑의 원인이나 이유로 내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자. 잘 믿으면 저절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면 잘 믿는 것이 맞다.

캄보디아 믿음의 형제 자매처럼 ( 선교지 또는 부모님 세대처럼) 우리는 이제 예수 믿는다는 것만으로 미움받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탄식만 나온다.

세상이 날 별로 미워하지 않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