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3:16-28 하나님의 지혜

왕상 3:16-28 하나님의 지혜

뻔 한 스토리가 되어버리 솔로몬의 재판.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사실 이야기는 ‘지혜로온 한 창기’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우선 두 창기가 솔로몬 앞에 나왔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문제를 왕이 직접 재판하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하여간 두 창기가 솔로몬 앞에 섰다. 이 때 한 여인이 자초지종을 말한다. 둘의 출산에서, 다른 여인의 아이가 죽은 이유, 그리고 아이가 뒤바뀐 것을 조리있게 말한다. 이 여인이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이다.”[21]라고 결론 지을 때 사용된 ‘자세히 보니’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라는 단어와 같다. 곧 ‘분별하는 지혜’다.  여기까지라면 창기의 지혜나 솔로몬의 지혜나 오십보백보다.

두 창기는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다.”이라는 공방을 주고 받는다. 솔로몬의 판결은 모두들 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으로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두려워하게 된다. 28절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지혜’의 지혜라는 단어는 솔로몬이 구하고 받은 지혜와 다른 단어다. 그런데 이후에는 솔로몬의 지혜를 언급할 때도 하나님의 지혜에 사용하는 같은 단어를 쓴다. 솔로몬의 지혜가 협의의 ‘분별하는 지혜’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된 것이다. 결국 받은 지혜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 더 지혜롭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혜를 구하는 자는 지혜로울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더 지혜로울 것이다.

//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가까이 한 솔로몬 // 저들의 자초지종을 듣고 합리적으로 판단한 솔로몬 // 합리적인 사고보다 생명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솔로몬

왕상 3:1-15 솔로몬의 꿈

왕상 3:1-15 솔로몬의 꿈

내우를 해결한 솔로몬은 외환을 대비한다. 그 방법중의 하나가 주변 강대국과의 정략결혼이다. 그 첫번째 기록이 애굽왕 바로의 딸을 왕비로 맞이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선왕 다윗의 이름을 혼주로 그대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솔로몬은 꿈에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다.  11절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에 사용된 지혜라는 단어는 ‘분별하는 지혜’다. 오늘 본문에서 이 단어는 세번 사용되었다. 첫번째가 9절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에서 ‘분별하게’로 번역되었고  다른 하나는 12절의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에서 ‘총명한’으로 번역된 단어다.

그러니 ‘지혜’는 분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이고,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것이다. 총명하다는 것은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다. 바르게 분별하기 (지혜롭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듣는 것이다. ‘듣는 마음’[9]과 ‘오직 송사를 듣고’[11]에 사용된 단어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를 듣는 마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리하면 지혜는 ‘듣고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은 내치를 위해 지혜, 즉 듣고 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을 구했다. 이 지혜라는 단어는 잠언에서도 여러번 (28번) 반복된다. 그 중 한 구절이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29:7]이다.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줄 지식이 없다고 할 때 ‘알아 줄’에 사용된 단어다. 즉 ‘악인은 바르게 분별하는 (지혜로운) 지식이 없느니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중요한 것이 결국은 백성의 사정을 분별하는 지혜다. 그중에서도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듣고 바르게 분별하는 지혜다. 솔로몬은 선왕 다윗에게 이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목동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다윗. 솔로몬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함으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세대 지도자인 솔로몬에게는 다윗에게 있었던 인생의 굴곡이 없었다. 다윗이 대장부가 되라고 유언한것과 이어진다. 스스로를 작은 아이로 인정한 솔로몬은 대장부가 되어야 했다. 대장부란 부모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분별력 (지혜)를 가진자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솔로몬을 기뻐하셨다. 그래서 지혜로운 마음을 주셨다. 인생에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구하지 않는 부귀영화도 주셨다.  솔로몬이 사는 날 동안 솔로몬과 부귀를 견줄 왕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 더 장수의 축복. 어느정도는 조건적인 장수도 허락하셨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지키면 오래 살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솔로몬이 깨어나서 보니 꿈이었다.

일장춘몽. 아니다 꿈에서 이미 누린 것이 아니라 이루어 질 ‘꿈’이기 때문이다.

왕상 2:36-46

왕상 2:36-46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46b]

내부의 적들을 차례로 처리합니다. 선왕 다윗이 유언으로 남긴 시므이에 대한 지혜로운 처리는 3년이나 걸렸지만 결국 이루어졌다.

솔로몬의 시므이에 대한 처리는 남은 여생 ‘주거제한’이었다. 시므이는 지정된 거주지, 예루살렘을 이탈할 경우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시므이는 순순히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삼년동안 잘 지켜오던 판결을 도망간 종들을 찾아오기 위해 깼다. 자신의 생명을 두 종의 몸 값과 바꾼것이다.

그러데 솔로몬은 사형 판결문에서 주거지 이탈뿐 아니라 “네가 네 마음으로 아는 모든 악 곧 내 아버지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그러나 솔로몬 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왕위는 영원히 여호와 앞에서 견고히 서리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네가 선왕 다윗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안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예루살렘에서 여생을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를 돌아본다. 예수 믿기전 하나님 모르고 살아왔다. 세상 가치관을 따라 살아왔다. 하나님께 악을 행한 것이다. 그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셨다. 그것도 젊을 때 은혜를 받았다.  시므이는 삼년만에 자신이 받은 은혜에 무뎌졌다. 그러나 나는 삼십년 넘게 아직도 그 은혜를 붙잡고 있다. 그렇다고 그동안 기드론 시내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얼마나 자주 발을 담갔으면 늘 축축한 느낌이다.

// 시므이는 사실 기드론 시내를 건너지는 않았다. 시므이가 두 종을 찾아 갔던 가드는 예루살렘 동남쪽 기드론 시내를 건너지 않고도 갈 수 있는 서남쪽에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떠났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예루살렘의 경계는 시므이에게 루비콘강이었다.) 신앙의 경계도 기드론 시내처럼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처럼 확실한 경계는 건너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는 변명은 안통한다.

왕상 2:26-35

왕상 2:26-35

//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아비삭 요청을 이전의 모반사건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당시 아도니야의 모반에 가담했던 제사장 아비아달을 고향 아나돗으로 유배보냈다. 아비아달을 죽이지 않은 까닭은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에서 알 수 있듯이 선왕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을 함부로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 아비아달이 선왕 다윗과 동고(동락) 하였던 것도 이유의 하나로 덧붙인다. 이렇게 아비아달은 제사장 직을 파면 당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었던 아비아달은 엘리 가문에서 제사장이 끊어진다는 말씀이 응하는 당사자가 된 것이다. (삼상 2장 3장)

아도니야의 반정에 참여했던 요압이 아도니야와 아비아달의 소식을 들었다. 그 역시 이번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했다.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잡고 사면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였던 것일까? 그러나 솔로몬은 브나야를 보내어 요압을 치라고 하였다.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있는 요압을 죽이지 못하고 돌아오자 솔로몬은 재차 장막안에서라도 요압을 처단하라고 명한다. 브나야는 솔로몬의 명대로 다시가서 요압을 죽였다. 솔로몬은 율법을 수호하는 판결을 한 것이다.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출애굽기 21:14]

솔로몬은 요압을 대신하여 브나야를 군사령관을, 제사장 사독에게 아비아달의 역할까지 맡겼다.

정권교체에 따른 피비린내.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집과 그의 왕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33] 솔로몬이 왕위에 앉아 첫번째로 한 일이 제단 뿔을 잡은 아도니야의 사면이었는데… 일의 결국은 피를 불렀다. 정녕 피흘림이 없이는 평강이 없단 말인가?

// 드디어 군대와 종교를 모두 거느린 제왕이 탄생하였다. 어쩌면 이것이 솔로몬이 퇴락하는 전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지나간다. 우리나라도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보다 패자들과 기득권 세력의 반성과 자숙이 필요하다. 패자들이 기득권자와 함께 목소리를 낸다면 그 결과는 솔로몬 시대와 다를게 없을 것이다.

왕상 2:13-25 밧세바의 마지막

왕상 2:13-25

솔로몬이 왕위에 앉아 첫번째 행한 일은 아도니야를 살려주는 일이었다.

솔로몬이 다윗이 죽은 후 첫번째 행한 일은 아도니야를 죽이는 일이었다.

아도니야는 솔로몬 왕에게는 여전히 잠재적 위험 요소였다. 더군다나 아도니야와 함께 반역을 꾀했던 제사장 아비아달과 요압이 아직 살아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도니야는 왕권에 대한 미련에 제 무덤을 스스로 팠다. 밧세바를 찾아가서 다윗 말년을 시중 들었던 수넴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솔로몬에게 부탁해 달라고 한 것이다. 밧세바에게는 화평의 일로 왔고 아주 작은 부탁이라고 하며, 또 솔로몬이 왕위에 앉게 된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고 인정하였지만 이 부탁은 삼척동자도 그 의도를 알 수 있는 왕권에 대한 미련을 드러낸 것이었다.

솔로몬은 모친 밧세바를 오른쪽에 앉히고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할 심산으로)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지만 수넴여인을 아도니야에게 주라는 밧세바의 요청에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라고 단호히 그 요청을 뿌리친다.

// 이 사건 이후로 밧세바의 이름은 솔로몬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아도니야와 함께 무대에서 사라진다.

솔로몬은 “그가 만일 선한 사람일진대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그에게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1:52]라고 말하며 아도니야를 살려 주었다. 그러나 오늘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서 악한 것을 본 것이다. 그 즉시 브나야를 보내 아도니야를 죽였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보서 1:15 새번역]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욕심을 버려야 할 이유다. 그 어떤 욕심도 화평을 위한 것일 수 없다. 물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포장 할 수 있는 거룩한 욕심도 있을 수 없다.

욕심은 죄의 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