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20:22-34

  • 왕상 20:22-34

그선지자는 일차전을 크게 아긴 아합왕에게 이차전을 대비하라고 예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차전을 대패하고 돌아간 아람왕의 신하들은 새로운 전술전략을 벤하닷에게 제시하였다.

첫번째는 운동장 사정이 좋아야 하니 경기장을 바꾸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삼십이명이나 되는 부감독직을 폐지하고 코치만 두어 감독의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세번째는 일차전에 잃은 선수를 대신해서 새로운 선수를 보강하라고 하였다.

해가 바뀌어 벤하닷은 이차전을 시작했다. 일차전과 마찬가지로 수적으로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우세했고 경기장 상황도 울툴불퉁하지 않고 평평했다. 아합왕은 일차전 시작과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아합왕에게 일차전 결과를 상기시켰다. 승패는 전력이나 전술, 운동장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 이번 승리로 제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라.

시합은 한동안 소강상태였다가 한순간에 이스라엘이 승기를 잡았다. 벤하닷은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주전선수들도 후보도 차례로 쓰러졌다. 이제 심판의 판정만 남았다. 그때 벤하닷의 신하들이 작전타임을 요청하라고 조언했다. (심판은 작전타임을 받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승리를 확신한 아합왕은 아람왕이 애걸하는 바람에 승리감에 도취되어 작전타임을 받아주었다. 승부는 연장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나친 승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잊게하고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든다.

 

왕상 20:13-21

왕상 20:13-21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한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나아왔다. 그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에겐 개인적으로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가 관심문구인데 아합에게는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누구를 통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지 묻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방 고관의 청년들 (우리로 하면 화랑이 되나? / 서양의 표현으로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선제 공격이라고 예언한다.

아합은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였다. 230명. 기드온의 300 용사보다 작은 규모다. 그리고 싸움에 나갈 병사를 계수하니 칠천명이었다. 사관은 의도적으로 칠천명이라는 수를 적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알에게 무릎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은 사람의 수와 동일한다. 세상싸움이 영적싸움이 되는 순간이다.

사람의 수에 의지한 벤하닷은 자신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낮에 돕는 왕 삼십이 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상태였다. 고관의 청년들의 선제공격은 적중했다. 벤하닷은 도망할 수 밖에 없었다. 아합왕은 뒤따라 나가서 아람을 물리쳤다.

열지파의 고관의 청년들이 삼십이명의 족장들을 이긴 것이다. 전쟁은 사람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한 선지자. 열왕기서의 사관은 굳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고뇌와 달리 무명씨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합왕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번 여호가가 하나님인줄 아는데 실패한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은 결국 실패한 것이다.

전쟁에서 지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쟁에서 이기고도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왕상 20:1-12

왕상 20:1-12

선지자의 이야기에서 다시 왕들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군대를 모아 북이스라엘을 포위했다. 재미있는 표현은 왕 삼심이 명이 벤하닷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왕 32명. 아마도 아람은 통일왕국이라기 보다 작은 부족들의 연합국이었을 것이다. 작은 부족국가들 중 힘있는 부족이 대표하는 연합국. 당시에는 32개 (혹은 33개) 부족이 속해있었던 것 같다.

그런 아람이 그래도 통일왕국이었던 북이스라엘이 만만해진 것이다. 물론 북이스라엘도 10개 지파로 이루어진 나라이지만 말이다. 숫자상으로 3:1이 넘는 우위를 점한 아람에게 북이스라엘의 번영기를 이끌었던 아합왕도 꼼짝 못하고 벤하닷의 요구를 다 들어 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아합왕은 벤하닷의 첫번째 요구 조공과 인질에 대해서 합의해 주었다. 그런데 벤하닷은 여기에 자신감을 얻어 지나친 요구를 하였다. 첫번째 요구에 더하여 아합이 (북이스라엘이) 기뻐하는 것을 뒤져서 가져가겠다고 하였다. 이에 아합은 장로들을 모아놓고 사정을 설명하였다. 조공과 인질에 대해 거절하지 못하였다. 추가요구에 대해 말할 틈도 없이 모든 장로들과 백성들은 조약을 이행하지 말라고 한다. 아니 조약을 맺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도 아합은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첫번째 요구는 들어줄 수 있으나 두번째 요구는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돌려 보냈다. 아합은 철저하게 자신을 벤하닷의 종임을 자처했다.

벤하닷은 선전포고를 한다. 내가 사마리아를 잿더미로 만들겠다. 완전히 먼지 가루로 만들어 손으로 집을 수도 없게 하겠다. 많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릴 것이다. 아마도 아람이 삼십이 명의 족장을 유지한 이유는 삼십이가지의 헛된 신들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아합도 응수한다. 김치국부터 마시지 마라. 갑옷 벗기전에는 큰 소리 쳐봤자다.

벤하닷은 열을 받을대로 받았다. 공격준비를 하라.

전형적이 세상싸움이다. 강자는 약자에게 요구하고 약자는 강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강자가 지나치게 나오면 약자도 배째라 식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가장 힘든 것이 강자가 약자가 기뻐하는 것을 빼앗는 것이다. 어쩌면 강자한테는 결코 필요도 없는 것을 약자에게 고통을 주려는 전형적인 ‘악’을 도모하는 것이다.

세상 싸움을 벌이는 벤하닷과 아합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라는 것을 몰랐다.

왕상 19:1-21

왕상 19:1-21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의 패전을 목격한 아합, 아니 삼년 반 동안의 가뭄의 해갈을 만끽하며 마차를 달려 궁으로 돌아 온 아합. 그는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했다.

아합은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했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전달했다고 한다면 아합은 가뭄을 해갈을 선언한 엘리야는 쏙 빼놓고 만다. 하여간 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아합은 갈멜산 사건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는 백성들의 외침을 외면한 것이다.

그러니 이세벨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 주장인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싸움의 결과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두고보자, 내일 다시 싸우면 죽는 쪽은 너 엘리야다’라는 도전을 엘리야에게 하였다. 이세벨은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니라 신들을 등에 업고 싸우겠다고 하였다. 어찌보면 이세벨도 억장이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당장 엘리야를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기약하겠다는 거다. 백성들이 엘리야 편에 섰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엘리야가 이 상황에서 이사벨의 도전을 피했다. 사관은 엘리야가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하였다고 기록한다. 북이스라엘에서 유다로 그리고 유대 광야를 지나 호렙산으로. 엘리야는 무너졌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죽음을 피해 도망친 엘리야가 죽기를 원하는 상황. (두번이나) 천사의 도움이 없이는 먹고 마시는 것도 못할지경에 이른 엘리야. 엘리야도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했을까? 더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자신감을 상실한 엘리야. 결국 그는 호렙산 한 굴에 칩거하고 만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동굴속에 묻혀있어서는 안된다. 드러나야 한다. 엘리야는 자신을 변호하였다. 자신은 하나님께 특별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는데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그런데 자신의 생명마져도 위험하다고. 오!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강한바람으로, 지진으로, 불로 나타내보이셨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적가운데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세미한 소리. 말씀으로 엘리야와 함께 하셨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는냐?”

한번 무너지 엘리야의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에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의 신탁은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기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의 후계가 정해졌다는 것은 엘리야의 은퇴를 의미한다. 근본도 없이 나타난 (그저 길르앗 디셉 사람) 엘리야는 엘리사부터 만난다.

엘리사. 사밧의 아들. 열두 겨릿소로 밭을 가는 부농의 아들이었을 그는 엘리야를 따른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지 않았다. 자신을 따르라는 표로 겉옷만 던졌을 뿐인데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엘리사는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엘리야에게 요청했고 엘리야는 허락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한 겨릿 소를 잡고, 멍에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주어 먹게 하고 자신은 엘리야를 따르면 수종 들었다.

오늘은 생각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왕상 18:16-29

왕상 18:16-29

오바댜는 아합왕을 만나 엘리야를 찾았다고 보고하고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러 갔다. 엘리야를 마난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고 부른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합과 오므리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정정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갈멜산 대결이 시작된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모으라고 한다. 아합이 선지자를 불러모으자 엘리야는 모인 백성들에게 나아가 결단은 촉구한다. 너희가 어느때까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든 바알이든 참 하나님을 따르라고 하였건만 백성들은 잠잠하였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선지자의 대표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갈멜산 대결을 시작한다. (아세라 400명은 어디 갔을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낮까지 아무리 바알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엘리야를 만난 아합은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말했다.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을 엘리야에게 떠 넘긴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합과 오므리’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들도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길로 행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잘못은 두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재물과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재물이 따라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지 않으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하나님을 따르든지 재물을 따르든지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