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6:15-34

왕상 16:15-34

바아사 왕조를 진멸한 시므리의 반정은 칠일천하로 막을 내린다. 시므리 반정은 유다 아사왕 27년에 있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진중에서 시므리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진중의 백성들은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삼았다. (시므리도 군대 절반을 통솔한 지휘관이었으나 전장에 나가 있지 않고 왕궁이 있는 디르사에 있다가 모반을 하고 왕이 되었다.)

오므리는 백성들의 힘을 얻어 블레셋을 향해 겨누었던 칼을 디르사 왕궁을 향했다. 아무래도 전장에 있던 군인들의 힘이 후방에 남아있던 시므리 보다 강했다.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 죽었다. 여러보암의 길을 걷던 바아사 왕조를 심판한 시므리 역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죽었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일주일 천하에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범죄했을까? 그러니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오므리 왕조의 시작도 순탄하지 않았다. 오므리가 시므리파를 이기자 디브니파가 오므리파를 대항했다. 결국은 오므리파가 디브니파를 이기고 오므리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유다 아사왕 31년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오므로 왕조가 확립되기 까지 약 4년정도가 필요했다. 오므리는 12년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으로 사관은 기록하는데 이것은 시므리를 축출한 때부터 계산한 것이다. 그는 첫 6년동안은 시므리가 불태운 디르사 왕궁에서 그리고 나머지 6년은 세멜에게서 산 사마리아 산위에 새로 건설한 왕궁에서 통치했다.

오므리도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 더욱 악하게 행했다.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요 그 결국은 ‘온 집안의 진멸당함’이라는 역사를 알고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왠지 하나님께서는 오므리 왕조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을 선언하시지 않으셨다. 오므리는 조상들의 묘에 묻히고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를 이었다. 이것이 유다왕 아사 38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 오므리 통치기간은 만으로 치면 시므리를 물리친 이후 11년 쯤 되는 것이니 사관은 열왕들의 통치기간을 가능한한 길게 적었던 모양이다.)

아합에게도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는 평가가 붙는다. 심지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겼다라고 한다. 그 증거로 아합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아 바알을 섬겨 예배했다고 기록한다.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제단을 쌓고 아세라 상도 만들었다. 그 이전의 모든 왕보다 심히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였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그런데도 오므리 왕조에 대한 심판의 메세지는 주어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여로보암 왕조와 바아사 왕조에 대해 선지자를 통하여 심판의 메세지를 선포하셨고 그 말씀을 성취하셨다. 그런데 오므리 왕조에 대해서는 침묵하시는것일까? 사관은 그 때에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다가 맏아들 아비람과 막내 스굽을 잃은 사건을 포함시킨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고 한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을 때) 맹세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 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수 6:26]

여리고성 함락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역사였을 것이다. 여리고성 함락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여호수아의 맹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관이 아합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다가 맏이와 막내를 잃은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는 것은 선지자 이상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리라.

하나님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