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7:1-7

왕상 17:1-7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 디셉사람 엘리야! 성경을 대표하는 선지자 엘리야의 출신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서울에 사는 사람 중 강원도 출신 아무개라고나 할까. 그가 어느지파에 속했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북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끈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 선지자로 등장한다. 아합의 이스라엘은 오므리가 불타 폐허가 된 디르사 대신 사마리아성을 건축하는 등 새로운 번성기를 맞았다.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신(하나님)은 여호와’ 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가 아합에게 건기를 예언한 첫마디가 곧 그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바알신 숭배가 마치 북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번영을 가져왔다고 착각하는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 년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라는 예언은 “내 말이 없으면 수 년동안 바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와 같은 의미였다. ‘가뭄’은 바알신이 없음을 의미한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 마 후에 그릿 시내도 말랐다.[7] 비가 내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중이라는 증거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가뭄속에서도 보호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릿 시내가 마르기 까지 그릿  시냇물을 마시고 까마귀들이 아침 저녁으로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었다. 엘리야는 순종했다. 어쩌면 까마귀들이 아침 저녁으로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는 부정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하게 된 음식이었다. 마치 배고픈 베드로가 환상중에 본 광주리안의 동물처럼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부정하다고 생각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음식이었기에 순종하고 먹었을 것이다.

// 그런데 진짜 까마귀는 무엇이었을까? 그냥 까마귀였을까? 아니면 까마귀로 상징되는 사람들이었을까?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댓가가 왕뿐아니라 전 이스라엘이 치러야할 재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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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엽 선배가 보내온 김진웅 목사 묵상 카톡에서 퍼옴

2017.6.15(목)
왕상17:1-7
찬송 376장 나그네와 같은 내가

바알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가 극에 달했던 시대에 ‘엘리야’라는 이름의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가 참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미션을 주셨습니다. 가서 이렇게 말해라.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왜 하필 비와 이슬로 경고하셨을까요? 당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비와 이슬은 바알이 내려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바알은 비와 이슬을 내리는 신이었습니다. 본래 목축업을 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업을 농사로 바꾸었습니다. ‘업을 목축에서 농사로 바꾸었으니, 신도 여호와에서 바알로 바꿔야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종교도 바꿔야지.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여호와를 신으로 믿고 있어. 요즘은 돈이 신이야, 학벌이 신이야, 자격증이 신이야.’ 이렇게 된 시대가 엘리야 시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추억이 된 시대. 하나님은 교회에 와서만 찾는 시대, 일상생활에서는 돈이 하나님이 되고 학벌과 자격증이 하나님이 된 시대가 엘리야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엘리야는 ‘여호와만 참 신’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먼저 자신이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여호와가 신임을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이 비를 마음대로 하시는 분임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의 의미는 농사, 농사는 먹고 사는 것, 삶을 의미합니다. 엘리야는 죽고 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먼저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요단 동편의 그릿 시냇가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 곳은 비가 올 때는 물이 흐르지만,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는 말라버리는 곳입니다. ‘그릿’이라는 지명은 ‘외진곳’ ‘외딴곳’의 뜻입니다. 엘리야는 언제 말라 버릴 지 모르는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마시면서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홀로 추위에 떨며 매일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물은 시냇물 마를 때까지는 먹을 수 있다지만, 먹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참 기가 찹니다.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을 먹고 살라고 하십니다. 주로 시체나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냇물은 언제 마를지 모르고, ‘까마귀가 내일도 성한 고기를 물어다 줄까?’ 불안해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 그릿 시냇가 엘리야의 인생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곳을 내버려두고 엘리야에게 이 그릿 시냇가로 가서 살게 하셨을까요? 하루 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게 하셨을까요? 이 그릿 시냇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요단 앞입니다. 앞은 동편을 의미합니다. 요단 동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직전에 마지막 광야 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이 요단 동편에서 그들은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하루 하루 하늘만 바라보며 살았던 곳이 이 요단 동편입니다. 엘리야는 바로 그 생활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는 살 수 없는 불안한 곳, 이 곳에서 엘리야는 시냇물을 의지하지 않고, 까마귀를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비가 와야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학벌이 있어야, 돈이 있어야, 높은 자리가 있어야 잘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믿음을 깨뜨리십니다. 자기의 자녀, 자기의 선지자에는 이렇게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비가 와서 사는 것이 아니야. 비를 내리는 나 여호와가 너를 살리는 것이야. 이것 경험하고 이것 증거해야 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기근과 기갈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먹이고 입히시는지 경험하기 원합니다. 더이상 비와 이슬을 의지하지 않고;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하는, 진정한 믿음을 만들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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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석 동문이 올린 카톡 (출처를 난 모른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의 다른 글을 받아 올려봅니다. 역시 좋은 글입니다.

[하나님은 돌보실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돌보실까?
하나님은 정말 자신의 사람들을 먹이시고 입히실까?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돌보신다.
그런데, 돌보시는 방법은 다소 의외다 .

1. 보호하심.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
선포의 대상은 아합왕이다.
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하나님을 거부한 왕 아합.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합왕에게 가서 이스라엘 땅에 있을 가뭄을 예언했다.

선포한 뒤에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왕상17:3)

반전이다. 숨어야 했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온 천지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인 엘리야에게 주신 보호가,
숨을 곳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숨지 않아도 될 상황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하시고,
공격이 오면 적들을 물리쳐 주시는게 아니라,
숨으라고 하신다.

당당하게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을 외친 엘리야는
초라하고 비겁하게 숨어야 했다.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엘리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한 성경의 사람들이
숨고 도망갔던 일은 흔한 일이었다.

바울도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도망갔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행9:23)/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행9:25)/

심지어 ‘광주리’씩이나 타고
성벽에서 달아내려져 도망을 가야 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이.

2. 먹이심.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먹이신다.
감사하게도 숨어 살아가는 그 상황에서
먹여주신다.

(왕상 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런데, 또 반전이다.
시냇물을 마셔야 했고,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

까마귀가 음식을 가져다 주다니…
신기하신 하지만,
너무나 불편한 식사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것.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가장 귀히 여기시는 선지자라면,
모 교회 담임목사처럼 매주일 부페식 식사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불편하게 시냇물을 마시게 하시고,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음식을 주시고,
그 음식의 종류도,
‘아침에도’ 떡과 고기,
‘저녁에도’ 떡과 고기였다. (왕상 17:6)

그러고 보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기적적인 음식을 먹고 살았었다.
하나님의 공급하신 그 음식은 ‘만나’였다.

그러나, 만나뿐이었다.
아침에도 만나, 저녁에도 만나,
오늘도 만나, 내일도 만나.

사람의 간사한 입맛이
매일 반복되는 그 음식을 좋아했을리는 만무한 일.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왕궁에서 호위호식하는 아합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엘리야보다
백번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

3. 왜 이러실까?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손이 짧아서,
힘이 없어서,
구원의 능력이 부족해서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보호하시고,
겨우 먹고 목숨 부지할 정도로만 먹이시는 것일까?

당연히 그럴리는 없을 터.

이는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인 듯 하다.

너무 풍족하게 가지면 망할 길로 가는 것이
죄인인 사람의 본성이기에
모든 것을 다 갖춘 풍성한 것을 주시는 것이
그 사람을 망치는 길임을 아시기에,
이러시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너무’ 풍족해서 망하는 사람들을
열왕기서에 나타나는 왕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보고 있지 않은가?

4. 불편하긴 하지만…

엘리야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만나를 보면서,
사도 바울의 광주리를 보면서
사실 마음이 불편하다.

저렇게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 것,
저렇게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운명이란 말인가 싶다,
도대체 왜 저러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싶다.

아니, 그것은 나의 현실이니,
도대체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싶다.

어떤 목사님의 고백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게 사실 피곤한 일이다. 그거 알고 보면 순전히 십자가다. 보통 크기의 십자가가 아니라 아주 무겁고 억센 십자가다. 그런 둔박하고 육중한 십자가를 메고 자갈길을 걷는 게 멀리서보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만나를 먹고 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으니 제쳐두고서라도,
엘리야는, 사도 바울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 불편한 삶을 감당해 내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5.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목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과는 별로 친하고 싶지 않다.
그 대답이 너무 정답이어서
사실은 정답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정답을 거침없이 쏟아내 놓는 사람들을 나중에 보면
몇백억씩 교회 재정을 횡령하고,
논문을 표절하면서까지라도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되고,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식에게 대형교회를 세습해 준다.

세상에 가장 믿기 어려운 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이 되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분들은,
대부분 이렇게 겸손히 말하더라.
“나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 하고는 거리가 먼 인생이니
내가 신적 쓰임새에 대해 무슨 비법을 논하거나 왈가왈부할 상황은 절대 아니고,
다만, 내 목표는 그냥 잘 견디는 것이다.
망하지 않고 잘 버티는 것, 그게 내 목표의 전부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하시는 사업이
기독교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
기독교의 학문적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일,
기독교 지성을 세워가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삶과 사업은,
크고 영광스럽고 넘치도록 이익이 나고
세상에서 우뚝 선 위대한 사람이나 기업이 되는 것과는 거리가 좀 먼 것 같다.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온갖 불법을 자행하고나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엘리야와 사도 바울은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타락하지 않고 걸어가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6. 나는?

나의 삶을 보면 간간히 이런 질문이 일어난다.
스스로의 삶을 향해서 스스로가 던지는 질문이다.
“왜 그러고 사냐?”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냐?”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것일까?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거창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대답은 낯간지러워서 못하겠다.
나는 그저 살아 남으려고 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으로는 살기 싫어서
매일 말씀을 묵상할 뿐이고,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이 자리에 와 있을 뿐이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어서 개척했고,
학원이 어려워져서 학원을 폐업을 했고,
지금은 학원에서 일을 할 수 있어서 일하면서 교회를 섬길 뿐이다.

감사하게도 자신의 사업장을 흔쾌히 내어주신 분이 계셔서
그 곳에서 교회를 이어갈 수 있어서
계속 교회를 하고 있고,
성경공부를 원하시는 분이 있어서
함께 성경공부를 할 뿐이다.

아무 능력이 없어서
그저 열리는 길을 겸손히 걸어갈 수 있을 뿐이고,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왔을 뿐이다.

나는 왜 이러고 사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그럴 정도의 깜냥은 전혀 되지 못하는 것 같고,
그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망하지 않는 삶이면 좋겠다.
그저 목회자다운 삶이면 좋겠다.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지키려고 버둥거리는 삶이면 좋겠다.

그런데, 분명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고 먹이시면서
이때까지 나를 인도해 오셨다는 것이다.

넘치도록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일용할 양식’을 주셨고,
망할 듯 망할 듯 위태롭긴 했으나,
죽지 않고 지금껏 잘 왔으니,
이것이 주께서 돌보셨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나의 갈망은 여전하다.
하나님을 누리고 싶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내 영혼이 풍성하고 싶다.
그 누림을 나누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러고 살고 있나보다.
이러고 ‘힘들지만 행복하게’ 말이다.

– 왕상 17:1-7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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