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7:8-24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다.
그릿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머루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곳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엘리야를 먹이시겠다고 하셨다.
시돈은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나라다. ‘엘바앗 (바알과 함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다. 바알신앙의 중심지로 엘리야를 보내셨다. 그렇다고 그릿 시내 외진곳에 숨어있으라 하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야는 순종하여 사르밧으로 갔다. 그가 성 문 앞에 이를 때 한 과부를 만났다. 그 과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물을 요청하면서 떡 한조각도 요구했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라고 대답하였다.
과부는 엘리야를 알아 보았을까? 과부의 대답을 보면 알아본 듯 하다. 이미 가뭄이 심해진 상황이라 가나안 일대에서는 가뭄이 아합왕에 대한 엘리야의 예언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엘리야를 본적이 없었겠지만 만약 엘리야가 낙타 털 옷에 가죽 띠를 띠었다는 옷차림을 그때부터 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 엘리야라고 알아 보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원수 같은 입장이다. 엘리야의 예언으로 자신과 아들마저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떡까지 요구하는 엘리야에 대해 돌연 반항조로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떡까지 달라고 웃기지 마라 너때문에 우리가 굶주리고 있는데 너 줄 떡이 어디 있니! 있다면 우리가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 뭐 이런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엘리야는 평안을 전한다. 그래 네 말대로 마지막 떡을 만들어라. 나를 위하여 작을 떡 한개를 만들어 가져 오고 과부와 과부 아들을 위하여는 나중에 만들라고 한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라 하셨느니라”라고 과부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순종은 과부의 몫이다. 과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순종의 결과는 엘리야도 과부의 가족도 육의 양식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종의 결과는 항상 부족하지 않았다이다. 차고 넘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먹을 것이 있다는 것으로 평안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은 것이다. 과부에게 있어서는 전재산과 같은 아들이다. 과부의 반응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 복음은 때론 저주같이 전해질 때가 있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받아 다락으로 안고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했다. 엘리야의 기도도 과부의 반응과 다를게 없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 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재앙일 수 있다.
그래도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아이들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다.
과부는 신앙고백을 한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과부에게 가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바알신이 잠시 자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떨어지지 않는 밀가루와 마르지 않는 기름도 마술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니 과부의 엘리야 봉양은 가뭄에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한 행동에 불과 했을 수 있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은 달랐다.
//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 오시는 것부터,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이것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의 세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기 그만큼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