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9:1-21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의 패전을 목격한 아합, 아니 삼년 반 동안의 가뭄의 해갈을 만끽하며 마차를 달려 궁으로 돌아 온 아합. 그는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했다.
아합은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했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전달했다고 한다면 아합은 가뭄을 해갈을 선언한 엘리야는 쏙 빼놓고 만다. 하여간 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아합은 갈멜산 사건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는 백성들의 외침을 외면한 것이다.
그러니 이세벨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 주장인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싸움의 결과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두고보자, 내일 다시 싸우면 죽는 쪽은 너 엘리야다’라는 도전을 엘리야에게 하였다. 이세벨은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니라 신들을 등에 업고 싸우겠다고 하였다. 어찌보면 이세벨도 억장이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당장 엘리야를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기약하겠다는 거다. 백성들이 엘리야 편에 섰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엘리야가 이 상황에서 이사벨의 도전을 피했다. 사관은 엘리야가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하였다고 기록한다. 북이스라엘에서 유다로 그리고 유대 광야를 지나 호렙산으로. 엘리야는 무너졌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죽음을 피해 도망친 엘리야가 죽기를 원하는 상황. (두번이나) 천사의 도움이 없이는 먹고 마시는 것도 못할지경에 이른 엘리야. 엘리야도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했을까? 더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자신감을 상실한 엘리야. 결국 그는 호렙산 한 굴에 칩거하고 만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동굴속에 묻혀있어서는 안된다. 드러나야 한다. 엘리야는 자신을 변호하였다. 자신은 하나님께 특별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는데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그런데 자신의 생명마져도 위험하다고. 오!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강한바람으로, 지진으로, 불로 나타내보이셨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적가운데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세미한 소리. 말씀으로 엘리야와 함께 하셨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는냐?”
한번 무너지 엘리야의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에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의 신탁은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기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의 후계가 정해졌다는 것은 엘리야의 은퇴를 의미한다. 근본도 없이 나타난 (그저 길르앗 디셉 사람) 엘리야는 엘리사부터 만난다.
엘리사. 사밧의 아들. 열두 겨릿소로 밭을 가는 부농의 아들이었을 그는 엘리야를 따른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지 않았다. 자신을 따르라는 표로 겉옷만 던졌을 뿐인데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엘리사는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엘리야에게 요청했고 엘리야는 허락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한 겨릿 소를 잡고, 멍에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주어 먹게 하고 자신은 엘리야를 따르면 수종 들었다.
오늘은 생각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