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8:1-15

왕상 18:1-15

오바댜! 아합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바댜도 있었고 오바댜가 숨겨준 백명도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암흑의 시대, 두려움의 시대였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다시 아합왕에게 나갈 것을 말씀하셨다. 엘리야는 사마리로 갔다. 아마도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엘리야는 아합왕에게로 출발했다.

아합왕은 일 왕궁 을 오바댜에게 맡기고 있었다. 왕의 비서실장이라고 해야 할까? 정무수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여로보암의 길에 악을 더한 아합왕의 최측근에서 일하는 오바댜가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오늘날이 였다면 스스로 옷을 벗고 내려와야 하는데. 하여간 오바댜는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할 때 선지자 100명을 구해, 숨겨주었다.

사마리아의 기근은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아합왕이 친히 물의 근원과 시내를 조사해서 가축들을 살리는 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위해 오바댜와 함께 북이스라엘 땅을 두루 다녔다. 효율을 위해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로 갔다. 그 길에서 오바댜는 엘리야를 만나 알아본다.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아합왕에게 가서 자신이 여기 있다고 알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오바댜는 두려워한다. 자신이 아합왕에게 말하러 간 사이에 엘리야가 자리를 떠나면 허위보고로 자신만 죽게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선지자 100명도 숨겨 주었는데 그것을 모르느냐고 항변한다.

엘리야는 오바댜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라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였다. (이에 오바댜는 아합왕에게 가서 기근의 원흉인 엘리야를 찾았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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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의 가뭄과 기근의 원흉으로 지명수배를 받은 엘리야는 죽음을 각오하고 아합왕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음을 무릅쓰고 숨겨준 오바댜는 여전히 현실적 핍박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고 있었다. 아합왕에게 기근을 예언한 엘리야의 일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바댜의 일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왕상 17:8-24

왕상 17:8-24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다.

그릿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머루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곳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엘리야를 먹이시겠다고 하셨다.

시돈은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나라다. ‘엘바앗 (바알과 함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다. 바알신앙의 중심지로 엘리야를 보내셨다. 그렇다고 그릿 시내 외진곳에 숨어있으라 하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야는 순종하여 사르밧으로 갔다. 그가 성 문 앞에 이를 때 한 과부를 만났다. 그 과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물을 요청하면서 떡 한조각도 요구했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라고 대답하였다.

과부는 엘리야를 알아 보았을까? 과부의 대답을 보면 알아본 듯 하다. 이미 가뭄이 심해진 상황이라 가나안 일대에서는 가뭄이 아합왕에 대한 엘리야의 예언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엘리야를 본적이 없었겠지만 만약 엘리야가 낙타 털 옷에 가죽 띠를 띠었다는 옷차림을 그때부터 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 엘리야라고 알아 보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원수 같은 입장이다. 엘리야의 예언으로 자신과 아들마저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떡까지 요구하는 엘리야에 대해 돌연 반항조로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떡까지 달라고 웃기지 마라 너때문에 우리가 굶주리고 있는데 너 줄 떡이 어디 있니! 있다면 우리가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 뭐 이런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엘리야는 평안을 전한다. 그래 네 말대로 마지막 떡을 만들어라. 나를 위하여 작을 떡 한개를 만들어 가져 오고 과부와 과부 아들을 위하여는 나중에 만들라고 한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라 하셨느니라”라고 과부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순종은 과부의 몫이다. 과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순종의 결과는 엘리야도 과부의 가족도 육의 양식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종의 결과는 항상 부족하지 않았다이다. 차고 넘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먹을 것이 있다는 것으로 평안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은 것이다. 과부에게 있어서는 전재산과 같은 아들이다. 과부의 반응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 복음은 때론 저주같이 전해질 때가 있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받아 다락으로 안고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했다.  엘리야의 기도도 과부의 반응과 다를게 없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 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재앙일 수 있다.

그래도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아이들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다.

과부는 신앙고백을 한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과부에게 가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바알신이 잠시 자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떨어지지 않는 밀가루와 마르지 않는 기름도 마술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니 과부의 엘리야 봉양은 가뭄에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한 행동에 불과 했을 수 있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은 달랐다.

//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 오시는 것부터,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이것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의 세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기 그만큼 힘들다.

왕상 17:1-7

왕상 17:1-7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 디셉사람 엘리야! 성경을 대표하는 선지자 엘리야의 출신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서울에 사는 사람 중 강원도 출신 아무개라고나 할까. 그가 어느지파에 속했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북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끈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 선지자로 등장한다. 아합의 이스라엘은 오므리가 불타 폐허가 된 디르사 대신 사마리아성을 건축하는 등 새로운 번성기를 맞았다.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신(하나님)은 여호와’ 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가 아합에게 건기를 예언한 첫마디가 곧 그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바알신 숭배가 마치 북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번영을 가져왔다고 착각하는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 년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라는 예언은 “내 말이 없으면 수 년동안 바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와 같은 의미였다. ‘가뭄’은 바알신이 없음을 의미한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 마 후에 그릿 시내도 말랐다.[7] 비가 내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중이라는 증거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가뭄속에서도 보호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릿 시내가 마르기 까지 그릿  시냇물을 마시고 까마귀들이 아침 저녁으로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었다. 엘리야는 순종했다. 어쩌면 까마귀들이 아침 저녁으로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는 부정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하게 된 음식이었다. 마치 배고픈 베드로가 환상중에 본 광주리안의 동물처럼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부정하다고 생각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음식이었기에 순종하고 먹었을 것이다.

// 그런데 진짜 까마귀는 무엇이었을까? 그냥 까마귀였을까? 아니면 까마귀로 상징되는 사람들이었을까?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댓가가 왕뿐아니라 전 이스라엘이 치러야할 재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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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엽 선배가 보내온 김진웅 목사 묵상 카톡에서 퍼옴

2017.6.15(목)
왕상17:1-7
찬송 376장 나그네와 같은 내가

바알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가 극에 달했던 시대에 ‘엘리야’라는 이름의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가 참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미션을 주셨습니다. 가서 이렇게 말해라.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왜 하필 비와 이슬로 경고하셨을까요? 당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비와 이슬은 바알이 내려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바알은 비와 이슬을 내리는 신이었습니다. 본래 목축업을 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업을 농사로 바꾸었습니다. ‘업을 목축에서 농사로 바꾸었으니, 신도 여호와에서 바알로 바꿔야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종교도 바꿔야지.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여호와를 신으로 믿고 있어. 요즘은 돈이 신이야, 학벌이 신이야, 자격증이 신이야.’ 이렇게 된 시대가 엘리야 시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추억이 된 시대. 하나님은 교회에 와서만 찾는 시대, 일상생활에서는 돈이 하나님이 되고 학벌과 자격증이 하나님이 된 시대가 엘리야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엘리야는 ‘여호와만 참 신’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먼저 자신이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여호와가 신임을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이 비를 마음대로 하시는 분임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의 의미는 농사, 농사는 먹고 사는 것, 삶을 의미합니다. 엘리야는 죽고 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먼저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요단 동편의 그릿 시냇가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 곳은 비가 올 때는 물이 흐르지만,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는 말라버리는 곳입니다. ‘그릿’이라는 지명은 ‘외진곳’ ‘외딴곳’의 뜻입니다. 엘리야는 언제 말라 버릴 지 모르는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마시면서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홀로 추위에 떨며 매일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물은 시냇물 마를 때까지는 먹을 수 있다지만, 먹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참 기가 찹니다.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을 먹고 살라고 하십니다. 주로 시체나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냇물은 언제 마를지 모르고, ‘까마귀가 내일도 성한 고기를 물어다 줄까?’ 불안해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 그릿 시냇가 엘리야의 인생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곳을 내버려두고 엘리야에게 이 그릿 시냇가로 가서 살게 하셨을까요? 하루 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게 하셨을까요? 이 그릿 시냇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요단 앞입니다. 앞은 동편을 의미합니다. 요단 동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직전에 마지막 광야 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이 요단 동편에서 그들은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하루 하루 하늘만 바라보며 살았던 곳이 이 요단 동편입니다. 엘리야는 바로 그 생활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는 살 수 없는 불안한 곳, 이 곳에서 엘리야는 시냇물을 의지하지 않고, 까마귀를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비가 와야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학벌이 있어야, 돈이 있어야, 높은 자리가 있어야 잘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믿음을 깨뜨리십니다. 자기의 자녀, 자기의 선지자에는 이렇게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비가 와서 사는 것이 아니야. 비를 내리는 나 여호와가 너를 살리는 것이야. 이것 경험하고 이것 증거해야 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기근과 기갈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먹이고 입히시는지 경험하기 원합니다. 더이상 비와 이슬을 의지하지 않고;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하는, 진정한 믿음을 만들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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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석 동문이 올린 카톡 (출처를 난 모른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의 다른 글을 받아 올려봅니다. 역시 좋은 글입니다.

[하나님은 돌보실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돌보실까?
하나님은 정말 자신의 사람들을 먹이시고 입히실까?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돌보신다.
그런데, 돌보시는 방법은 다소 의외다 .

1. 보호하심.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
선포의 대상은 아합왕이다.
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하나님을 거부한 왕 아합.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합왕에게 가서 이스라엘 땅에 있을 가뭄을 예언했다.

선포한 뒤에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왕상17:3)

반전이다. 숨어야 했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온 천지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인 엘리야에게 주신 보호가,
숨을 곳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숨지 않아도 될 상황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하시고,
공격이 오면 적들을 물리쳐 주시는게 아니라,
숨으라고 하신다.

당당하게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을 외친 엘리야는
초라하고 비겁하게 숨어야 했다.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엘리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한 성경의 사람들이
숨고 도망갔던 일은 흔한 일이었다.

바울도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도망갔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행9:23)/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행9:25)/

심지어 ‘광주리’씩이나 타고
성벽에서 달아내려져 도망을 가야 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이.

2. 먹이심.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먹이신다.
감사하게도 숨어 살아가는 그 상황에서
먹여주신다.

(왕상 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런데, 또 반전이다.
시냇물을 마셔야 했고,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

까마귀가 음식을 가져다 주다니…
신기하신 하지만,
너무나 불편한 식사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것.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가장 귀히 여기시는 선지자라면,
모 교회 담임목사처럼 매주일 부페식 식사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불편하게 시냇물을 마시게 하시고,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음식을 주시고,
그 음식의 종류도,
‘아침에도’ 떡과 고기,
‘저녁에도’ 떡과 고기였다. (왕상 17:6)

그러고 보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기적적인 음식을 먹고 살았었다.
하나님의 공급하신 그 음식은 ‘만나’였다.

그러나, 만나뿐이었다.
아침에도 만나, 저녁에도 만나,
오늘도 만나, 내일도 만나.

사람의 간사한 입맛이
매일 반복되는 그 음식을 좋아했을리는 만무한 일.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왕궁에서 호위호식하는 아합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엘리야보다
백번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

3. 왜 이러실까?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손이 짧아서,
힘이 없어서,
구원의 능력이 부족해서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보호하시고,
겨우 먹고 목숨 부지할 정도로만 먹이시는 것일까?

당연히 그럴리는 없을 터.

이는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인 듯 하다.

너무 풍족하게 가지면 망할 길로 가는 것이
죄인인 사람의 본성이기에
모든 것을 다 갖춘 풍성한 것을 주시는 것이
그 사람을 망치는 길임을 아시기에,
이러시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너무’ 풍족해서 망하는 사람들을
열왕기서에 나타나는 왕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보고 있지 않은가?

4. 불편하긴 하지만…

엘리야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만나를 보면서,
사도 바울의 광주리를 보면서
사실 마음이 불편하다.

저렇게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 것,
저렇게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운명이란 말인가 싶다,
도대체 왜 저러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싶다.

아니, 그것은 나의 현실이니,
도대체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싶다.

어떤 목사님의 고백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게 사실 피곤한 일이다. 그거 알고 보면 순전히 십자가다. 보통 크기의 십자가가 아니라 아주 무겁고 억센 십자가다. 그런 둔박하고 육중한 십자가를 메고 자갈길을 걷는 게 멀리서보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만나를 먹고 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으니 제쳐두고서라도,
엘리야는, 사도 바울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 불편한 삶을 감당해 내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5.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목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과는 별로 친하고 싶지 않다.
그 대답이 너무 정답이어서
사실은 정답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정답을 거침없이 쏟아내 놓는 사람들을 나중에 보면
몇백억씩 교회 재정을 횡령하고,
논문을 표절하면서까지라도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되고,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식에게 대형교회를 세습해 준다.

세상에 가장 믿기 어려운 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이 되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분들은,
대부분 이렇게 겸손히 말하더라.
“나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 하고는 거리가 먼 인생이니
내가 신적 쓰임새에 대해 무슨 비법을 논하거나 왈가왈부할 상황은 절대 아니고,
다만, 내 목표는 그냥 잘 견디는 것이다.
망하지 않고 잘 버티는 것, 그게 내 목표의 전부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하시는 사업이
기독교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
기독교의 학문적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일,
기독교 지성을 세워가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삶과 사업은,
크고 영광스럽고 넘치도록 이익이 나고
세상에서 우뚝 선 위대한 사람이나 기업이 되는 것과는 거리가 좀 먼 것 같다.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온갖 불법을 자행하고나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엘리야와 사도 바울은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타락하지 않고 걸어가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6. 나는?

나의 삶을 보면 간간히 이런 질문이 일어난다.
스스로의 삶을 향해서 스스로가 던지는 질문이다.
“왜 그러고 사냐?”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냐?”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것일까?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거창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대답은 낯간지러워서 못하겠다.
나는 그저 살아 남으려고 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으로는 살기 싫어서
매일 말씀을 묵상할 뿐이고,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이 자리에 와 있을 뿐이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어서 개척했고,
학원이 어려워져서 학원을 폐업을 했고,
지금은 학원에서 일을 할 수 있어서 일하면서 교회를 섬길 뿐이다.

감사하게도 자신의 사업장을 흔쾌히 내어주신 분이 계셔서
그 곳에서 교회를 이어갈 수 있어서
계속 교회를 하고 있고,
성경공부를 원하시는 분이 있어서
함께 성경공부를 할 뿐이다.

아무 능력이 없어서
그저 열리는 길을 겸손히 걸어갈 수 있을 뿐이고,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왔을 뿐이다.

나는 왜 이러고 사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그럴 정도의 깜냥은 전혀 되지 못하는 것 같고,
그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망하지 않는 삶이면 좋겠다.
그저 목회자다운 삶이면 좋겠다.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지키려고 버둥거리는 삶이면 좋겠다.

그런데, 분명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고 먹이시면서
이때까지 나를 인도해 오셨다는 것이다.

넘치도록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일용할 양식’을 주셨고,
망할 듯 망할 듯 위태롭긴 했으나,
죽지 않고 지금껏 잘 왔으니,
이것이 주께서 돌보셨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나의 갈망은 여전하다.
하나님을 누리고 싶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내 영혼이 풍성하고 싶다.
그 누림을 나누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러고 살고 있나보다.
이러고 ‘힘들지만 행복하게’ 말이다.

– 왕상 17:1-7 묵상.

 

왕상 16:15-34

왕상 16:15-34

바아사 왕조를 진멸한 시므리의 반정은 칠일천하로 막을 내린다. 시므리 반정은 유다 아사왕 27년에 있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진중에서 시므리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진중의 백성들은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삼았다. (시므리도 군대 절반을 통솔한 지휘관이었으나 전장에 나가 있지 않고 왕궁이 있는 디르사에 있다가 모반을 하고 왕이 되었다.)

오므리는 백성들의 힘을 얻어 블레셋을 향해 겨누었던 칼을 디르사 왕궁을 향했다. 아무래도 전장에 있던 군인들의 힘이 후방에 남아있던 시므리 보다 강했다.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 죽었다. 여러보암의 길을 걷던 바아사 왕조를 심판한 시므리 역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죽었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일주일 천하에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범죄했을까? 그러니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오므리 왕조의 시작도 순탄하지 않았다. 오므리가 시므리파를 이기자 디브니파가 오므리파를 대항했다. 결국은 오므리파가 디브니파를 이기고 오므리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유다 아사왕 31년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오므로 왕조가 확립되기 까지 약 4년정도가 필요했다. 오므리는 12년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으로 사관은 기록하는데 이것은 시므리를 축출한 때부터 계산한 것이다. 그는 첫 6년동안은 시므리가 불태운 디르사 왕궁에서 그리고 나머지 6년은 세멜에게서 산 사마리아 산위에 새로 건설한 왕궁에서 통치했다.

오므리도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 더욱 악하게 행했다.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요 그 결국은 ‘온 집안의 진멸당함’이라는 역사를 알고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왠지 하나님께서는 오므리 왕조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을 선언하시지 않으셨다. 오므리는 조상들의 묘에 묻히고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를 이었다. 이것이 유다왕 아사 38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 오므리 통치기간은 만으로 치면 시므리를 물리친 이후 11년 쯤 되는 것이니 사관은 열왕들의 통치기간을 가능한한 길게 적었던 모양이다.)

아합에게도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는 평가가 붙는다. 심지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겼다라고 한다. 그 증거로 아합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아 바알을 섬겨 예배했다고 기록한다.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제단을 쌓고 아세라 상도 만들었다. 그 이전의 모든 왕보다 심히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였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그런데도 오므리 왕조에 대한 심판의 메세지는 주어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여로보암 왕조와 바아사 왕조에 대해 선지자를 통하여 심판의 메세지를 선포하셨고 그 말씀을 성취하셨다. 그런데 오므리 왕조에 대해서는 침묵하시는것일까? 사관은 그 때에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다가 맏아들 아비람과 막내 스굽을 잃은 사건을 포함시킨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고 한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을 때) 맹세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 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수 6:26]

여리고성 함락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역사였을 것이다. 여리고성 함락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여호수아의 맹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관이 아합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다가 맏이와 막내를 잃은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는 것은 선지자 이상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리라.

하나님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왕상 15:33-16:14

왕상 15:33-16:14

북이스라엘에서 바아사는 나답 왕을 죽이고 왕이 되어 이십사년을 통치했다. 사관은 바아사에 대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고 평가한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바아사에게 선지자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였다. 예후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보면 바아사는 티끌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바아사를 세워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고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길의 끝인 여로보암 집안의 진멸이 바아사 집안에도 동일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돌이킬 생각을 하지 못할까? 바아사 왕조도 여로보암의 왕조처럼 망한다. 바아사는 조상들의 묘에 장사되고 아들 엘라가 왕위를 잇는다. 바아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엘라 때 성취된다. 엘라는 이스라엘을 이년 다스렸다.

여로보암 왕조의 나답은 그래도 전쟁중에 바아사의 반정에 의하여 죽었다. 그러나 엘라는 왕궁이 있던 다르사에서 왕궁 책임자의 집에서 마시고 취했을 때 군대장관 시므리의 모반에 의하여 죽었다.

이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에서 바아사 그리고 시므리왕조로 바뀌었다. 시므리는 바아사 온 집안 사람을 죽였다. 집안 사람 뿐만아니라 친구까지 죽였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 하신 말씀을 성취하셨다.

사관은 반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죄’ 때문이라고 밝힌다. 바아사의 죄, 엘라의 죄. 죄는 헛된 것이다. 덧없는 것이다. 우상숭배다. 이런 헛된 것들로 하나님의 노엽게 한 결과라고 한다.

왕조실록에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다 죽었다. 엘라는 마시고 취했을 때 시므이의 모반에 의하여 죽었다. 달랑 두 사건만 기록되어있다.  그야말로 헛된 삶이다.

헛된 것들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