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5:25-32

왕상 15:25-32

유다 아사왕 둘째 해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2년을 다스렸다. 사관의 평가는 나답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들 아버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라고 정리한다. ‘여로보암의 길’이란 자신도 범죄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범죄하게 하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여로보암의 집안을 그냥 두시지 않으셨다.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를 택하여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나답을 죽이고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다. 바아사는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경고하신대로 여로보암의 온 집을 진멸하였다.

하나님께 범죄하고 백성들을 범죄하도록 이끈 ‘여로보암의 길’의 끝에는 하나님의 분노가 기다리고 있다. 분노의 결과는 심판이요 죽음이다. ‘여로보암의 길’은 그렇게 길지 않다.

나답 때의 사건은 깁브온에서 바아사가 나답을 죽인 반정이 유일하다. 더군다나 아버지 여로보암과 달리 그의 죽음에는 ‘조상들과 함께 자매’의 표현이 빠졌다. 그만큼 그는 저주스러운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사관은 다윗의 길을 걷고 있는 아사와 여로보암의 길을 따를 바아사 왕 사이에도 일생동안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왕상 15:1-8

왕상 15:1-8

아비얌이 르호보암을 이어 유다 왕이 되었다. 아비얌은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의 아들로 기록된다. 아비살롬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으로 본다. 히브리어에는 아들과 손자, 딸과 손녀를 구분하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비얌의 어머니, 르호보암의 아내 마아가는 압살롬의 딸이라기 보다는  압살롬의 손녀일 것이다. 그러니 역대하의 기록과 종합해보면 압살롬의 딸 다말이 우리엘과 결혼해서 낳은 딸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아비얌은 어떤 왕이었을까? 사관은 아비얌은 르호보암의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히브리어에서는 아들과 손자의 구분이 없듯이 아버지와 할아버지 구분도 없다. 조상이라는 단어는 아버지로도 해석될 수 있다.)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비얌에게 아들을 주어 왕위를 잇게 하셨다. 사관은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지키시는 이유는 다윗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에게 행안 일을 유일한 잘못이라고 적었다. 우리아의 일 외에선 평생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평가한다.

아비얌도 국력의 쇠퇴를 남북의 분열에서 찾았는지 모르겠다. 르호보암 때부터 남과 북은 주도권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릴 생각은 못하고… 쯪쯪

결국 삼년의 짧은 통치기간을 마치고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었다.

왕상 14:21-31

왕상 14:21-31

사관은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이야기에 이어서 남유다왕 르호보암에 대해 기록한다. 르호보암은 마흔하나에 왕위에 올라 십칠 년간 유다를 다스렸다. 사관은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택하신 성읍이라고 확언한다. 이것은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이스라엘아 니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벧엘과 단에 둔 것이 죄가 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표현이라 생각된다.

사관은 르호보암의 어머니 암몬여인 ‘나아마’의 이름을 다시 언급한다. 솔로몬의 수많은 왕비와 후궁과 첩 중에서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이름이다. 솔로몬이 왕이 되기 전에  르호보암을 낳았으니 솔로몬은 이미 젊었을 때부터 이방 여인에 대한 탐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고, 나아마는 아마도 첫번째 아내로서, 조강지처였을 것이다. 암몬 사람 나아마가 왕비로서 왕의 어머니로 이스라엘에 끼친 영향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유다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이다. 조상들 보다 더 /뛰/어/나/게/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노엽게 했다. 산당을 짓고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다. 그리고 그 땅에 남색하는 자가 있었다. 사관은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가나안 사람들이 하던 일을 본받은 결과라고 적는다. (이것을 어떻게 나아마의 영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영광을 업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오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애굽왕 시삭의 공격을 받아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만다. 물론 솔로몬이 만들 금 방패로 빼앗겼다. 이렇듯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반세기도 안돼어 쇠퇴하고 말았다. 르호보암은 그래도 동메달은 된다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동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시위대 대장에게 잘 보관하게 하고 성전에 갈 때만 사용하였다. (방패와 성전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마는 솔로몬 때부터 성전은 의전행사의 장소로도 사용되지 않았을까? 외국 정상이 방문하면 현충원을 들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를 통해 르호보암이 계획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간의 전쟁을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항상 주도권 싸움을 했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주인되지 않으시는 곳에는 내적 평화도 있을 수 없다. 르호보암이 죽고 그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된다. 로호보암의 어머니  암몬 사람 나아마의 이름이 한번 더 언급된다.

나아마는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솔로몬의 여인이다. (스바의 여왕도 이름은 모른다.) 암몬 사람이었다. 르호보암의 나이로 보아 그녀는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외교적 통혼정책에 의해 데려온 후비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윗왕국 확장 전쟁 때 전승물로 데리고 왔을 수 있다. 청년 솔로몬은 이 이방여인에게 이끌렸을 것이고 나아마는 /조/강/지/처/로 솔로몬이 왕이 되는 우여곡절을 함께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수많은 후궁과 첩 위에 /군/림/하/는/ 조강지처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드디어 왕대비가 되어 르호보암의 정책도 좌우지 하지 않았을까? (그래 여자하기 나름이다.)

십칠년 르호보암의 시대는 이렇게 솔로몬의 그림자로 마무리된다. 영광의 그림자가 아니라 암울한 그림자로.

 

왕상 14:1-20

왕상 14:1-20

‘그 때에’ 여로보암이 다스리던 때에는 주목할만한 일이 많았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 사건도 기록되어있다. 마치 출애굽 열재앙의 마지막 재앙처럼 어쩌면 여로보암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그 때’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들 아비야가 병들자 아내에게 실로에 거하는 선지자 아히야를 찾으라고 부탁한다. 아히야가 아직 살아 있었다. (살아있네. 방가방가) 여로보암이 아히야 선지자를 찾은 이유는 아히야가 이전에 여로보암이 왕이 될 것이라는 자기에게 듣기 좋은 예언을 했던 선지자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좋은 예언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완전히 무당을 찾아 점을 치는 꼴이다.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복비로 떡 열개와 과자와 꿀 한병을 가지고 가라고 했다. 21세기를 살면서 점집에 드나드는 것, 혹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점집에 드나드는 것을 감추려고 하듯 북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창시자인 여로보암은 자신이 다시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는 것을 감추려고 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변장을 하고 가서 아히야의 장래에 대해 점을 치고 오라고 부탁한다.

실로에 기거하는 아히야는 늙었다. (여로보암에 대한 예언으로 그는 솔로몬에게 구박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실로에 칩거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육신의 눈은 어두워졌지만 영안은 여전하였다. 하나님은 아히야에게 여로보암의 아내가 올 것을 알려주고 대답할 내용을 지시하셨다.

여로보암의 아내가 찾아왔다. 아히야 선지자는 발소리에 여로보암의 아내인 줄 알고 하나님께 받은 명령을 그대로 전한다.

첫번째로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버린 악을 지적하고 여로보암 집에 속한 사내는 다 쓸어버리시는 재앙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베푸신 은혜, 즉 왕이 되게 하신 것을 말씀하시고, 다윗의 길로 행하라고 명하셨음에도 더 악을 행한 것에 대해 책망하셨다. 그리고 그 악이 여로보암 자신을 위하여 다른 신들을 만들며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다.)

두번째로 여로보암의 아내가 성읍으로 들어갈 때 아비야가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아비야는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자격을 갖추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백성들이 좋아하는 성품을 가졌던 것 같다.) 온 이스라엘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로보암과 달리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비야는 묘실에 장사될 것이라고 하셨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으면 개가 먹고, 들에서 죽으면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는 저주와 비교하면 아비야는 복되게 죽은 것이다.

세번째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왕을 일으켜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릴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도 ‘곧’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다.

네째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뽑아 강 너머로 흩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아세라 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결과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기로 하셨다. 여로보암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것, 이것이 ‘여로보암의 길’이다.

여로보암의 아내가 다르사로 돌아가서 집문지방에 이를 때 아들 아비야는 죽었다. 아히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장사하고 슬퍼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되었다.

여로보암은 22년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의 아들 나답이 왕위를 잇는다. 어쩌면 출애굽의 마지막 재앙과도 같은 아들 아비야의 죽음. 여로보암은 말씀의 성취를 보고도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도 부적처럼 생각하고, 자신을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드는 여로보암. 나를 네 등뒤에 버렸도다라는 하나님의 책망이 섬뜩하다. 호가호위를 누리다 말갛게 쓸어버림을 당한다. 마치 애굽의 병거들이 홍해에서 수장되는 장면이 연상된다.

오! 여로보암. 다윗에게 ‘그 때’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기회였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행하여 할 ‘정직’한 일이었다. 이것이 ‘다윗의 길’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 때’를 회개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오히려 범죄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범죄하게 했다. 이것이 ‘여로보암의 길’이다.

왕상 13:20-34

왕상 13:20-34

벧엘의 늙은 선지자 집으로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며 지친 몸을 쉬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임했다. 그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때로는 속임수에 능한 사람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유다에서 온 선지자가 (일관되게 사용하던 하나님의 사람에서 선지자라고 사관의 표현이 바뀐이유는 무엇일까?)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나귀에 태워 보냈다. 유다에서 온 사람 (이제는 선지자라는 표현도 안쓰고 그저 사람이라고… 음)은 길을 가다가 사자에게 물려 죽어 시체가 길에 버려졌고 (이상하게도) 나귀도, 사자도 그 시체 옆에 서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벧엘로 가서 사람들이게 자신들이 본 것을 말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도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확신에 유다에서 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아들들에게 준비 시킨 나귀를 타고 현장을 방문했다. 현장은 사람들이 전해 준 그대로 였다. 사자가 시체도 나귀도 먹거나 찢지 않았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와 슬피 울며 장사해 주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내 형제라 부르며 슬퍼 울었다.

장사한 후에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장사해 달라고 유언한다. 그리고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루어 진다고 예언하였다.

여로보암도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않았다. 여전히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다. 자원하는 사람은 산당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명백한 죄다. 여로보암의 집은 이 일로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서 제사장 엘리의 말년이 떠오른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 [삼상 3] 엘리는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때였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아이 사무엘에게 임한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임한 이상이 궁금했다. 그는 사무엘을 불러 하나도 숨기지 말고 자신에게 얘기 하라고 명령? 했고 사무엘은 엘리에게 자세히 조금도 숨김없이 말해 주었다. 엘리는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라고 말했다.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벧엘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은 희귀해졌을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제사장이 되는 현장 속에서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도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은 희귀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단을 향해 예언한 사건은 그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싶어했다. 하나님의 사람을 속이기까지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의 대상은 벧엘 제단만이 아니었다.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에 대한 예언이었다.

늙은 선지자의 유언적 예언도 제사장 엘리의 말과 마찬가지다.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벧엘의 늙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이 나의 처한 상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황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에 대한 기대가 더 커야 함을 배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