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2:36-23:12

민 22:36-23:12

발락과 발람이 만났다. 발락은 발람을 극진히 영접했다. 그러나 복채에 흔들려 출발했던 발람은 나귀사건을 통하여 이미 죽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외에는 아무런 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귀 사건을 알리 없는 발락은 복채를 더 내놓았다. 소와 양을 잡아 대접했다. 바알의 산당에 초대해서 이스라엘 진영도 보게해 주었다. 발람을 위해 제단 일곱도 새로 쌓아 주었다. 발람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줄 심산이었다.

발람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제단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것을 듣기위해 자리를 떠났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할 말을  주셨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이스라엘을) 어찌 저주하겠느냐?’ 하며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발락이 발람에게 저주하라고 데려 왔는데 오히려 축복하였다고 하자 발람은 하나님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까 라고 대답했다.

발락은 왜 그리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했을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일까? 모압 왕 발락은 시혼과 옥을 염려했던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과 암몬과는 다투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괜한 염려가 아닌가?

 

민 21:21-35

민 21:21-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바산 왕 옥과)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였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 [민 21:34]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우회로을 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로막는 방해세력들을 물리치고 땅을 점령한 기분 좋은 기억들도 있었다. 헤스본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이긴 사건이 기분 좋은 경험의 대표로 자주 언급된다.

40년 광야 생활로 지쳐 오합지졸과 같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진격할 수 있는 이런 좋은 경험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견고한 성 헤스본을 세우고, 화염의 공격력으로 모압을 삼켰던 아모리 왕 시혼을 어찌 물리칠 수 있었을까?

두려워 하지 말라. 샬롬!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민 21:1-20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동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민21:4]

캄보디아 건기 때는 여기 저기서 길을 막고 결혼식 텐트를 친다. 결혼식 텐트로 우회하였는데 또 다른 결혼식 텐트로 오도가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건기 때 주택가를 운전해야 할 때는 결혼식 텐트를 만나지 않아야 한다. 마음 상하기 일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을 땅을 우회해야 했다. 우회로가 원래 가려고 했던 길보다 더 나은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첩경도 아니다. 글자 그대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러니 지칠대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망이 터져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원래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백성이지 않았는가? 특별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들을 다 멸하지 않았던가? 에돔 땅도 그렇게 지났으면 좋으련만 하나님의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길과 달랐다.

백성들의 원망이 모세를 향하여 뿜어나오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하셨다. 그제서야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모세는 기도했도 하나님께서는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고 하셨다. 뱀에 물린자가 놋뱀을 보면 산다고 하셨다. 그리고 말씀대로 뱀에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 본즉 모두 살았다.

이것이 은혜다. 놋뱀에 무슨 능력이 있을리 만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능력이 있는 것이다. 뱀에 물린 자 둥 놋뱀을 쳐다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이런 호기심은 필요없다. 중요한 것은 뱀에 물려 고통중에 놋뱀을 쳐다 본 사람은 한명도 빠짐없이 모두 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 원망중에 불뱀에 물려 죽어야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을 쳐다 보게 하심으로 살게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죽어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을 쳐다보게 하셨듯이 죄로 죽어 마땅한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를 쳐다보게 하셨다.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의 여정은 탄탄대로가 아니었고 우회로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길이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보다 탄탄대로만 추구하다보면 원망이 절로 생길 것이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을 걷다보면 우회로라 할지라도 목적지가 보이고 원망대신 노래가 입에서 터져 나올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렀다.

민 20:14-29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민 20:14]

세상은 녹록치 않다. 형제지간이라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400년 이상 애굽생활과 40년의 광야생활에 찌든 무리를 형제라고 맞아주기에는 현실적이지 않다. 야곱이 하란에서 에서에게 많은 선물을 가지고 돌아 올 때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합당한 값을 치르고서라도 에돔 땅을 지나가고자 협상을 벌였지만 돌아 온 답은 ‘노’였다. 하나님께서는 헤스본 왕 시혼에게 대해서는 같은  일에 대해 진멸을 허락하셨지만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킬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신 2:5) 하셨기 때문이다.

에돔은 이 일로 영원히 멸절 되리라는 심판을 받는다 (옵1:10).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선처, 특별히 형제에 대한 선처가 필요하다.

세상은 내가 처한 어려운 사정을 알아 주지 않는다. 형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비빌 언덕은 하나님이시다.

20장은 미리엄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아론의 죽음으로 끝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 (히 9:27)

 

 

민 20:1-13

[민 20:1-13]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물도 없도다 [민 20:5]

영국을 다녀왔다. 아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하니 ‘먹는 것’이라고 한다. 집에서 일품요리에 (다른 반찬 없이, 물론 김치도 없치) 밥만 먹다가 이모집에서는 맛있는 것을 진수 성찬으로 먹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캄보디아에 오자마자 손님을 초대 하는 바람에 일품요리에 김치도 사고 국도 끓여 먹고 열대 과일에 아이스크림 후식도 먹었으나 이모집 음식에는 비할 바가 못되리라.

‘아빠 어찌하여 우리를 영국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 캄보디아로 데려왔습니까? 이 곳에는 재미있게 놀 놀이 동산도 없고 치즈도 없고 맛있는 음료수도 안사주시면서요’라는 불평이 절로 나올만 하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 아이들도 많이 컸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로 힘들었나보다. 40년이 지났건만 문제만 생기면 불평과 원망으로 애굽생활을 그리워 한다. ‘노예 생활’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나타내셨다. 심지어 모세와 아론까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는 믿음없는 행동을 했지만 (모세와 아론은 또 엎드렸지만 반복되는 엎드림에 지쳤을까 모세 특유의 온유함을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나타내셨다.

오늘 배우는 거룩함이란 반역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책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