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32:1-15

민 32:1-15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가축들을 전리품으로 나누었다. 각 지파에서 천명씩 군사를 보내었으니 르우벤과 갓 지파가 다른 지파에 비하여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 르우벤과 갓 지파가 가축을 다루는 전문 지파의 역할을 했을까?

하여간 르우벤과 갓 자손들은 심히 많은 가축을 이유로 요단 동편에 남기를 모세와 엘르아살, 그리고 지휘관들에게 요청한다. 가축을 치는 전문가 지파의 눈으로 볼 때 요단 동편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였다. 르우벤과 갓 자손들은 요단 동편에 남는 것을 은혜 입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을 책망했다. 온 민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가는데 어찌 요단 동편에 머물고자 하여 다른 지파 자손들을 낙담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은 막고자 하느냐가 책망의 요지였다.

모세는 사십년전 출애굽 1세대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했던 것과 같은 태도라고 재차 책망하였다. 약속의 땅으로 나가는 것을 낙심하게 한 출애굽 1세대들이 하나니님께 악을 행하여 사십년동안 광야에서 방황한 역사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 일이라고 책망의 강도를 높였다. 동편에 머무르는 것을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버리시고, 이스라엘은 멸망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동체의 경우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는 상황을 통한 인도다. 르우벤과 갓 자손들의 경우가 그렇다. 가축 떼가 늘었다. 요단 동편 땅은 목축하기 좋은 곳이다. 르우벤 자손의 입장에서는 자신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갓 자손들도 같은 생각을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지도자의 허락이다.

그러나 르우벤과 갓 자손들이 놓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상황의 변화나 주변 사람의 인정이나 지도자의 허락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울을 예를 들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바울 앞에 펼쳐진 상황은 막막했다. 믿음의 사람들도 예루살렘에 가면 잡힐 것이라며 이미 경고 했었다. 로마를 보아야 하는데 예루살렘에 잡혀있어야 했다. 로마로 가는 뱃길도 순탄치 않았다. 충분히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약속이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지 않은가!

 

 

민 31:25-54

민 31:25-54

전리품 분배는 정결의식 후에 이루어졌다. 즉 일주일이 후딱 지나갔다. 전리품 분배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 절반, 나머지 회중들이 절반을 차지했다. 전리품중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의 비율도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오백분의 일, 그러니깐 거의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에 반하여 회중은 전리품의 오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예를 들면 포로 사람의 경우 총 삼만이천명중 군인들이 만육천, 회중이 만육천씩 분배 받았지만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몫은 군인들이 32명, 회중이 320명으로 열배가 많았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백만명중에 일만이천명이라고 했다. 그러니 군인이 거의 십분의 일 수준이니, 군인들이 열배정도 더 전리품을 분배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전리품을 군인이나 회중이나 나눠 갖는 것은 마땅하나 전쟁에 직접 참여한 군인을 배려한 분배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전리품이 아니다.

“군지휘관들, 곧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이 모세에게 와서 보고하였다. “소관들이 이끄는 부하들을 세어 보았는데, 우리 쪽에서는 한 사람도 실종되지 않았기에,”[48,49]

바로 아군의 희생정도다. 죽은 군인이나 실종된 군인이 한 명도 없이 일만이천명이 ‘다’ 복귀한 것이다. 군지휘관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 그래서 전리품에서 분배받은 패물 즉 금붙이들과 사사로이 전장에서 탈취한 금붙이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이것을 기념했다.

// 궁금한 것은 ‘십분의 일’은 어디 갔을까? 그러니 특별한 소득에 대한 ‘십분의 일’이 당연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지휘관들이 금붙이를 드린 것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 드림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치열한 삶 속에서 얻은 은혜에 대한 감사는 따지기 어렵다.

++++

“모세에게 말하되 당신의 종들이 이끈 군인을 계수한즉 우리 중 한 사람도 축나지 아니하였기로 우리 각 사람이 받은 바 금 패물 곧 발목 고리,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 고리, 목걸이들을 여호와께 헌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민 31:49,50]

전쟁에서 승리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전리품이 아닌 바로 아군의 희생정도다. 전리품을 분배한 후 군지휘관들이 모세에게 죽은 군인이나 실종 된 군인이 한명도 없이 일만이천명이 ‘다’ 복귀하였다고 보고했다. 전장에서 지휘한 군지휘관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전리품분배와 그에 따른 하나님께 드릴 헌물 (제사장과 레위인 몫으로 돌릴)외에 자신들이 받은 전리품 중 금붙이 패물과, 전장에서 군인들이 사사로이 탈취한 금붙이를 모아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군지휘관들은 이것을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라고 밝힘으로써 한명의 희생도 없었음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자신들의 생명값을 드린 것이었다.

나의 헌물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득에 대한 감사인가? 건강에 대한 감사인가? 자녀에 대한 감사인가? 근본적으로 나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사여야 한다.

//속전은 한명당 5세겔이었으나 실제로 지휘관들이 일만이천명의 군인들을 대표해서 일만 육천 칠백 오십세겔의 금붙이를 드렸으니 한세겔 조금 더되는 속전을 내었다.

 

민 31:13-24

민 31:13-24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민 31:16]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돌아오는 개선부대를 모세와 엘르아살과 지도자들이 마중을 나갔다. 그런데 개선 행진이 모세의 진노로 깨졌다. 전쟁에 나간 군사들이 여자들을 다 살려 두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16절에서 ‘발람의 꾀’를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나귀로 말을 하게 하셔서 발람의 저주의 입을 막아 대신 축복을 하게 하셨지만 ‘악인의 꾀’를 좇은 발람의 마음은 그 상한대로 버려 두셨다. 그래서 그의 결국은 어제 본문대로 칼로 죽임을 당한다. 어찌보면 모압과 미디안의 미인계는 발람의 계략이었는지 모른다.

17절 18절 남자는 다 죽이고 사내를 아는 여자도 다 죽이고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살려두라는 모세의 명령이 집행되었을까? 사사기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악을 행하자 하나님께서는 일곱해 동안 이스라엘 백성를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셨다는 구절이 나온다. 모세의 진노는 표면적이었고 실제로는 남자아이들도 살아남지 않았을까?

민 31:1-12

민 31:1-1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디안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25장에서 “미디안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25:17] 이미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과 미디안의 여인들과 음행한 벌로 이만사천명이나 죽은 사건 직후에 하신 명령이었다.

그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계수하고 규례를 정비하면서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치라고 명하신다. 이 일이 모세의 마지막 임무라고 하셨다.[2]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치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원수, 여호와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셨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싸워주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각 지파별로 천명씩 만 이천명이 무장했다. (염병으로 죽은 이만사천의 절반이다.) 그리고 제자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전장에 함께 나갔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겼다. 미디안 남자들을 다 죽였다. 특별히 미디안 다섯왕과 함께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다고 확실하게 기록한다.

// 모세가 미디안 치기를 주저한 것은 미디안이 처가였기 때문이었을까?

// 제사장 비느하스가 전장에 나가 싸운 것은 미디안의 제사장 발람을 염두에 둔 영적전쟁의 의미가 있는 것인가?

민수기 29:1-11

민 29:1-11

일곱째 달 초하루는 나팔을 부는 절기다. 이날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일년 열두달에서 일곱째 달 초하루는 절반이 지난 후 맞이하는 첫번째 날이 된다. 후반전 휘슬을 부는 절기다. 후반전이 시작된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일곱 째 달 열흘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번에는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너희 심령을 괴롭게 하라’고 하신다. 이날은 속죄절(일)이다. 후반전을 시작하자마자 해야 할 일은 전반전의 잘못을 돌이키는 것이다. 너희 심령을 괴롭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신약시대에 적용 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7:10)가 될 것이다.

일곱째 달이 유월절이 첫째 달로 지정되기 전에는 그해 첫째달에 해당한다. 결국 일곱째 달은 종교력으로는 후반전의 시작이지만 일반력으로는 한해의 시작, 즉 전반전의 시작이라고 적용해도 된다. 시작 휘슬이 불리면 그냥 뛰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속죄부터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해를 거룩하게 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고후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