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8:1-15

민 28:1-15

제사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나는 제사부분이 싫다. 오늘날과 맞지 않기도 하지만 제사 용어가 너무 어렵다. 화제, 번제 뭐가 다른가. 불로 드리는 제사와 태워 드리는 제사. 제사의 종류인지 제사의 방법인지 그냥 읽어서는 도무지 구분할 수 없다. 상번제는 ‘항상 드리는 번제’인 것 같은데 국한문 혼용을 하지 않는 이상 이 단어를 이해하기를 쉽지 않다. 매일 드리는 번제니 차라리 ‘매번제’가 더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겠다. 다음세대를 위한 성경 번역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소제는 제사의 종류고 전제는 제사의 방법이다. 그런데 소제도 주로 곡식으로 드려지는 제사이니 제사의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자발적으로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니 제사의 한 종류다. 전제는 술을 따르는 제사 방법이다. 한국 전통 제사에서 술을 올리고 붓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전제는 관제라고 한다. 뭔가 통일 되어야 할 제사 이름이기도 하다. 하여간 제사는 이름이 너무 어렵다.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이름만으로도 그 제사의 종류와 방법이 뚜렸했을 것인데 다른 시대와 문화를 사는 나에게는 무척 어렵다.

하여간 제사는 매일 드려야 하고 일주일 씩 구별하여 드려야 하고 한달에 한번씩 구별하여 드려야 한다. 매일 드리는 제사는 아침 저녁으로 드려야 한다. 다시말해 하루 종일의 삶이 예배여야 한다. 그러니 주일만이 아닌 일주일 7일 모두가 예배여야 하고 매달 첫날 뿐만아니라 하루 하루가 예배여야 한다.

 

민 27:12-23

민 27:12-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12,13]

모세의 입장에서는 허망한 말씀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바라본다는 것은 모세에게도 소망의 메세지다. 한세대를 살아가는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는 세대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그것은 죽은 삶이나 다름이 없다.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나의 삶을 위한 것 뿐이라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가나안을 바라본다는 것. 그 땅이 이미 이스라엘 땅이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시지 않은가? 좀 더 살면서 가나안에서 직접 살아보면 뭐가 다를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로 가데스에서 반석을 두번친 사건을 언급하신다.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서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14)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달리 가나안에서의 삶을 미리 보여준다. 가나안 땅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세마져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룩함을 상실하는 땅일 것이다. 다시말해 진정한 가나안은 그 땅이 아니라 순종하고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조상에게 돌아가는 모세는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벗어나 순종과 거룩함에 들어가는 것이고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반역과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모세는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께 한사람을 세워달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시종을 들었던 장군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세우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안에 영이 머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여호수아에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민 27:1-11

민 27:1-11

민수기 두번째 인구조사의 목적은 전쟁보다는 땅분배를 위한 것이었다. 이십세 이상의 남자 수를 세는 이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 다섯명이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휘관들, 온 회중 앞에서 문제를 제기 했다.

슬로브핫은 1세대로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슬로브핫이 죽은 이유는 반역에 가담해서 벌로 죽은 것이아니라 자연사였다. 그런 그가 아들이 없다고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는 것은 형평에 어긋나다는 주장이었다.

모세는 이 사연을 하나님께 아뢰었고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셨다. 그리고 아들 없이 죽은 가문의 기업에 대한 부가적인 규례를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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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 이들 다섯명의 이름을 누가 기억할까? 어쩌면 여성 참정권의 효시가 아닐까? 여자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말을 들어주셨고 이들의 말이 옳다고 인정해 주셨다.

약자들의 문제를 들어 준 모세와 엘르아살과 지휘관. 이렇게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권력구조는 열린정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모세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아뢴다. 약자들이 제기한 문제라고 강자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게 묻는다. 뭔가 아이디얼하지 않은가!

7절.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에서 ‘옳으니’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라는 의미다. 달리 해석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아멘이다.

민 25:1-18

민 25:1-18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싯딤에 머무르고 있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싯딤에 머문 까닭은 확실하지 않지만 모압과 다투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하여간 고인물은 썩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브올의 아들 발람의 저주는 피할 수 있었으나 모압여자들의 유혹은 피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에게 절하고 바알브올 편이 되었다. (바알브올에게 가담하였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하나님께서는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을 교수형에 처라하고 하셨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었다. 회개의 눈물이었을까? 아마도 염병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 시므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였던지 모압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왔다. 시므리는 심판중에도 모압여자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무감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은밀히도 아니고 온 회중 앞을 지나가다니.

이것을 본 제사장 비느하스가 창으로 시므리와 수르의 딸 고스비를 찔러 죽였다. 그러자 염병이 멈췄다.  이만사천명이 죽었다.

우선 비느하스는 모압여자와의 음행을 창으로 찌른 일종의 속죄 행위로 그와 그 후순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받았다. 모압 여자의 유혹에 빠졌던 시므리의 이름도 성경에 기록되었고 시므리를 유혹했던 모압여인도 이름과 출신이 (고스비, 수르의 딸)기록되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시므리’라는 이름은 ‘어린 양’이라는 뜻이니 이번 사건의 속죄제물이 되었다는 것과 이름이 연관이 있는 듯 하다. ‘고스비’는 ‘거짓, 속이는 자’라는 뜻이니 시므리를 유혹했다는 사실과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마지막 절을 보면 고스비는 미디안 지휘관의 딸로 기록되었다.

모압과 다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치라고 하셨다. 모압과 미디안이 손잡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의 계락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만다. 절반의 성공인가?

 

민 24:10-25

민 24:10-25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아나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하게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대를 막아 존귀하지 못하게 하셨도다 [11]

발락이 화가 났다. 그는 발람에게 조소의 박수를 치면서 눈노의 말을 뿜었다. “내가 그대들 높여 심히 존귀하게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대를 막아 존귀하지 못하게 하셨도다.” 아! 어리석은 발락이여! 발락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던가? 애당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하다고 생각되어 발람에게 저주를 요청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발람은 복채에 대한 탐욕을 품었으면서도, 아니 그는 이방인이었음에도 점술과 복술에 능해서 였을까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다. 어제는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지 않았던가! 그는 이제 예언한다. 복술과 점술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지극히 높으신 자(하나님)의 지식을 아는 자로,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로, 엎드려서 눈을 뜬자로 예언한다.

‘발람’이라는 ‘이름은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라는 뜻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백성을 파멸시키는 예언을 한 자로 기억될 수 있다.

17-19절 예언은 가나안 정복과 다윗왕국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나라까지 포함된 예언이라고 생각된다. (예언은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