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96

새 노래로 하나님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하나님께 노래할지어다. [시 96:1]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전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역사 (役事/Works)를 선포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경외해야 할 창조주이시다. 존귀와 위엄, 능력과 아름다움, 영광과 권능 어떤 수식어로 하나님을 다 노래할 수 있을까?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지어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새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9절부터 곡조?가 바뀐다. (찬양자에서) 예배자가 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하나님 나라는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나라다. 이것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다. 하나님의 임재는 재판장으로서의 임재다. 하나님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신다.

교회 안과 밖에서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진실하심 새노래요 온 땅이 함께 불러야 할 노래다.

의와 진실함의 교회, 의와 진실함의 세상을 위해 노래(기도)하게 하소서

 

 

렘 20:7-18

사면초가 2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항우는 마지막임을 알고 부인 우희에게 ‘해하가’를 지어부른다.

산을 옮길 힘이 있고 세상을 덮을 기운이 있지만 /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항우의 애마)도 달리지 않는구나 /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하리요 / 우희여 우희여 어찌할꼬

천하?를 양분하고 있던 항우의 마지막은 평생의 여인 우희에 대한 염려였을까? 아니면 자신에 대한 한탄이었을까? 어찌할꼬 묻는다. 하여간 항우의 ‘해하가’에 우희 (우미인)은 ‘화항왕가’를 지어 답했다.

한나라 군인이 이미 땅을 침략해서 / 사방에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리네 / 대왕의 힘과 기운이 다하였으니 / 천한 첩이 어찌 살리요

우희는 답시를 다 부르고 칼로 자결했다는 전설이 있다.

 

예레미야 심정에서 우희를 발견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앞에 사면 초가의 상황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상은 예레미야가 패역한 백성들의 조롱에 사면초가가 된 것이다.[10] 심지어 친구들까지 저들 편에 섰다. 오직하면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좌절의 심정을 토해낼까? ‘어찌 살리요’ 항우나 우희보다 예레미아의 상황이 더 심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해야 하는데… 예레미야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간구한다.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 참고 인내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생과 슬픔을 보며 하나님과 함께 함이 부끄러움이라는 조소를 [렘 20:18]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국도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후4:8 말씀이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세상을 인내함으로 이길 큰 능력이다. 이 큰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다. 어찌 살리요. 어찌살리요. 통곡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몰랐던 항우와 우희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본다. 나도 부끄러움을 너머 면류관을 본다.

나도 하나님을 바라본다. 사면초가라면 위를 향해 눈을 떠야 한다.

렘 19:14-20:6

마골밋사빕

아니나 다를까 공동번역에서는 ‘사면초가’로 번역했다. ‘마골밋사빕’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성전총감독이었던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에게 준 이름이다.  바스훌은 도벳에서의 예언을 성전들에서도 외치는 예레미야를 잡아 칼을 채우고 가두었다가 풀어주었다. 예레미야는  갇혔다가 풀려났는데, 예레미야를 가두었던 바스훌 (자유)에게는 마골밋사빕 (포로) 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마골밋사빕’은 문자적으로 ‘사방의 두려움’이란 뜻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 ‘사면초가’라고 번역했다. 본문에서는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라고 주를 달았다. 공동번역의 ‘사면초가’가 적절한 번역인 듯 하다.

// 사면초가는 역설적으로 초왕 항우가 한왕 유방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진퇴양난’을 너머 사방에서 에워쌈을 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소리가 들린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적군의 노래 소리가 아니라 아군의 노래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데. 사방에서 초나라 병사들이 부르는 초가 소리에  항우는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 초나라 사람이 (포로가) 저렇게 많은고?” 하며 결국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역발산(혜)기개세’라는 해하가를 남기고 마지막전투에서 자결한다. 그때가 31세의 나이라 한다.

바스훌에게 주어진 마골밋사빕역시 자유자 바스훌에게 포로됨을 예언한 것이다. 물리적으로 사방으로 에워싸는 것이 바벨론 군대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방에서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다. 성밖 도벳에서, 성안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것이 두려움이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사면초가 상황이다. 적이 강한 것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는 평안의 메세지, 긍정의 신앙이 사방에서 들린다. 바벨론 강가에서 찬송을 울며 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렘 19:1-13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렘 19: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옹기를 사서 하시드문을 나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지고 간 옹기를 함께가 증인들 앞에서 깨뜨리라고 명하신다.

‘하시드문’은 공동번역에서는 ‘옹기 대문’이라고 번역한다. 깨진 질그릇을 내다 버리는 문이다. 예루살렘의 여러 성문중에서 ‘분문’ (똥문)이라고 불리는 문과 같다고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쓰레기장으로 열려 있는 문이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혹은 힌놈의 골짜기는 ‘게(골짜기)헨놈(힌놈)’이다. 인신제사와 쓰레기 소각등이 이루어진 곳으로 (게헨나) 지옥의 대명사로 쓰였다고 한다.

오늘 구절을 자세히 보면 옹기를 깨뜨리는 것은 사람이다. 옹기는 토기장이의 그릇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을 깨뜨리면, 사람은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이와 같이 불순종의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주민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메세지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결국 하나님의 옹기를 깨뜨린 장본인은 사람 자신이다. 자신들이 허물과 죄로 깨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깨어진 옹기를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다. 지옥같은 곳을 너머 죽음이다. 사람은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분은 그분 그리스도 예수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5]

렘 18:13-23

사람의 꾀란게 참.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 줄 현자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줄 예언자 (선지자)도 있다고 하나, 율법과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인 하나님 대신 허무한 것에 분향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면서) 낸 꾀에 스스로 속는 삶이다. [렘 18:18]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등을 보이시고 얼굴을 보이시지 않으시니 제사장인들 율법의 정신을 어찌 알 수 있으며, 옳고 바름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자도 없고,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하다 못해 끊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우상처럼 무감각해진 저들은 악으로 선을 갚는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예레미야는 그런 저들을 벌해달라고 기도한다. 예레미야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보복의 저주일까? 심판을 통하여 사람의 꾀를 의지하는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의 꾀를 이미 아심을 보여달고 간구한다. 그렇다면 이 역시 예레미야 개인적인 기도라기보다 ‘사람의 꾀’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간구가 아닐까?

선이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것이요 악이란 하나님 대신 자신들을 드러내는 일이다. 당연히 악으로 선을 갚을 수 없다. 내 삶에 인내가 더 필요하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