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3:12-19

대관식 vs폐위

대관식은 전제 군주가 왕위에 오를 때, 왕관을 받는 예식이다. 서양에서는 보통 왕위 계승자가 성직자 앞에 꿇어 앉으면 왕관을 씌움받음으로 왕이 된다. 대관식의 핵심이 바로 꿇어 앉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꿇어앉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 앞에 겸비한 것이 중요하다. 영국의 대관식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도 “하나님께서 저를 도우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간구로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사실 대관식이 좀 더 자주 거행되어야 하나님께서 대관식의 주관자이심이 선포될 수 있는데 엘리자베스 2세는 너무 오래 왕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너는 왕과 왕후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렘 13:1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끊임없이 청종하라고 하신다. 교만하지말라고 하신다.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다.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구절은 화관 대신 재를, 희락 대신 슬픔을, 찬송 대신 근심을 자초한다. 교만해서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어 앉은 (겸손한 ) 왕과 왕후에게 왕관을 씌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왕과 왕후에게 강제로)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고 명하신 후 왕관을 벗기신다고 하신다. 대관식 잔치가 되어야 할 자리가 폐위 당하는 자리가 된것이다.

하루를 대관식 잔치로 마치느냐 아니면 폐위의 수치로 마칠지는 겸손과 교만이 결정한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렘 13:1-11

예레미야의 역할극 (무언극)

등장인물: 예레미야, 보조1, 2, 3

준비물: 끄로마 2개 (캄보디아 스카프, 하나는 새 것, 하나는 낡아 헤어진 것), 하나님의 음성을 적은 메세지 보드, 해와 달 그림

무대: 무대를 양쪽으로 나누어 한쪽은 가게와 우물이 있는 마을, 다른 한쪽은 강가로 장식한다. 두곳 사이에 마을 쪽으로는 ‘예루살렘’ 강쪽으로는 ‘유브라테스’라고 적힌 이정표를 하나 둔다.

예레미야가 마을쪽에 등장한다. 곧이어 보조 1이 메세지 보드를 들고 예레미야 앞을 지나간다. (메세지 내용: 허리띠를 사서 허리띠를 띠고 물에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녀라) 예레미야는 끄로마 가게에서 끄로마를 사서 허리에 두루고 다닌다. 우물가에서 물을 마시면서 끄로마가 젖지 않도록 행동한다. 무대등이 꺼지고 예레미야는 퇴장.

보조 2와 3이 해와 달을 들고 무대를 여러번 지나가고 무대 등을 점멸함으로 여러 날이 지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레미야가 끄로마를 하고 마을쪽에 다시 등장한다. 보조 1이  메세지보드들 들고 예레미야 앞을 지나간다. (메세지 내용: 허리띠를 가지고 유브라데로 가서 바위틈에 감추라) 예레미야는 이정표를 여러번 돌아 강쪽으로 걸아가 끄로마를 풀어 바위틈에 감추고 마을로 돌아온다. 돌아올 때로 이정표를 여러번 돌아서 온다. 예레미야 퇴장

보조 2와 3이 해와 달을 들고 무대를 여러번 지나가고 무대 등을 점멸함으로 여러 날이 지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레미야가 무대에 다시 등장. 보조 1이 메세지보드를 다시 들고 예레미야 앞을 지나간다. (메세지 내용: 유브라데로 가서 띠를 가져오라) 예레미야는 이정표를 여러 번 돌아 강쪽으로 가서 낡고 헤어진 끄로마를 꺼낸다. 예레미야는 끄로마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다는 행동을 한다. 곧이어 조명이 꺼진다.

조명이 다시 켜지고 보조 1이 메세지 보드를 들고 나온다. (메세지 내용: 하나님께서 교회의 교만과 교회 지도자들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조명은 메세지 보드만 비춘다.

ㅠㅠ

// 1000킬로미터 떨어진 유브라데스 강까지 진짜 갔다 왔는지, 아니면 공동번역처럼 브랏시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교/만/이/ 하나님 백성의 자질을 썩게 했다는 것이 메세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처럼 되게 하려고 하셨으나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만해서) 듣지 않았다. 에라이

 

 

 

 

렘 12:7-17

그 백성들이 내 백성에게 바알의 이름을 불러 맹세하도록 가르쳤지만, 이제는 도리어 내 백성에게서 도를 배워 익혀 ‘야훼께서 살아 계신다.’ 하며 내 이름을 불러 맹세하게 되리라. 그렇게 되면 그들도 내 백성과 함께 어울려 잘살게 되리라. 그러나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민족들을 뿌리뽑아 아주 없애버리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렘 12:16,17 공동번역]

귀에 따갑게 반복되는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면 세움을 입고 불순종 하면 진멸하리라. 심지어 바알을 섬기고 이스라엘을 바알의 이름으로 미혹했던 이방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소유라도 하나님께 반항하면 원수의 손에 넘겨 주신다는 경고를 들어야 한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순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도’를 배워 그 ‘도’에 순종할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맛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렘 10:1-16

 

우상

넓은 길, 여러나라의 길

천기의 징조를 두려워 하는 길

도끼로 나무를 베어 두손으로 다듬고

금과 은으로 도색하고

못과 장도리로 고정하여 만든 우상

말도 못하고 걸어다니지도 못해서

오히려 사람이 메고 다닌다.

생기가 없는 피조물이니

우리에게 어찌 화를 주거나 복을 줄 수 있으랴.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

좁은 길, 하나님나라의 길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분

말도 못하게, 걸어다니지도 못하게

십자가에 못과 장도리로 고정하려고 했던가?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주님

생명의 빛되신 창조주

두려워 하라

렘 9:17-26

대곡문화.

대신 울어주는 문화. 우리나라에는 곡비가 있었다. 품삯을 받고 대신 울어주는 노비를 뜻한다. 주로 여자여서 ‘곡녀’라고도 한다. 원래 상례 (장례) 규정에 따르면 대곡하는 것은 상주의 몸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한다. 죽은자보다 산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위해 돌아가며 곡을 하다보니 대곡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나중에는 있는 사람이 곡하는 사람을 돈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돈받고 울어주는 것도 쉽지 않으니 대곡하는 노비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곡비가 일반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찌 대신 울어주기를 바랄 수 있으랴.

이스라엘에도 대곡문화가 있었나보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곡녀를 부르라고 하신다.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와서 애곡하라고 하신다. 듣는자가 눈물을 흘리도록 곡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 심판에 대한 예언을 듣지 않으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을 알기 싫어하니 이보다 더 애통할 일이 어디 있으랴. 온 나라가, 민족 전체가 울어야 한다. 그런데 지혜와 용맹이나 부요함을 자랑하려고 하다니.

자랑거리는 건강도 아니요, 부의 축적도 아니요,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과 정의와 공의의 삶을 사는 것, 자녀들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자랑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대신 울어준다.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자정의 목소리보다 세상에서 뭐라하는 소리가 더 많은 것 같다. 개독교라는 비난은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마음에 할례를 받게하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곡비의 울음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설상가상으로 할례가 면책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못해서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해서 벌을 받아야 한다. 날이 이르면 심판을 받는다. 예수 믿는다고 쉽게 말하지 말자. 예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 영접한 예수님이 계셔야 한다. 예수님 손잡고 다녀야한다. 예수님 손을 뿌리치고 믿는다고 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