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03:15-

한해가 이렇게 저뭅니다.

15 인생은 마르는 풀이요 시드는 꽃과 같습니다. 한해 한해 겉사람은 후패합니다. 16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바람같은 나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17 주님 사랑 안에 거해야 영생하며, 주의 의를 자손에게 물려 주어야 합니다. 18 그래서 주님의 약속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19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 20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천사들처럼)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주님을 찬양할 능력이 있습니다. 21 대장되신 주님의 군사되어 주님의 명령에 충성하는 것이 왕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22 나를 지으신 주님, 나를 다스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온 맘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온 몸으로 (주의 말씀을 행함으로) 주님을 송축합니다. (시 103)

한해가 이렇게 저뭅니다. 맘은 조금 더 주님과 가까와 진 한해였지만 몸은 여전히 게으른 한해였음을 반성합니다. 새해에는 나를 지으신 주님의 나라 백성으로 온맘과 온몸으로 충성하길 다짐합니다.

빌립보서 2:5-11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5-8)

우리가 품어야 할 ‘이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머리에만 머무는 것도 가슴에까지 내려 온 것도 아닌 손과 발까지 내려가 ‘순종’으로 실천된 마음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형체를 가진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 가장 낮게 사셨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존의 단절인 죽음까지 순종하셨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예수의 이름 (9-11)

(이러므로)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이셨다. 천하 모든 사람들로 하여름 예수의 이름에 무릎꿇게 하셨다. 그리고 천하 모든 사람들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여 성부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너무나 어렵다. 영이 형체를 가지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구속함을 당하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으니 표현도 안된다.) 바울은 기껏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적용했다. (고전 9:19)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사람을 속박하는 것에 자신도 속박시키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물론 영원히 그 속박에 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은 (이 땅에서) 죽으면 영원한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없게 된다.

‘나의 이름을 높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이렇게 적용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에베소서 2:11-18

평강의 왕

매일성경이 성탄의 의미를 묵상하라고 선택한 본문이다. 이방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과 하나됨을 역설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하나됨. 먼 데 있는 자와 가까운 데 있는 자의 하나됨.

그리스도는 둘 사이의 막힌 담, 하나님께로 나가지 못하게 했던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고 자기 육체로 막힌 담을 허셨다. 이제 ‘이 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지어져 가야 한다. 할례자/무할례자, 너와 나가 아니라 한 새사람, 우리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이 둘’이 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하나님과 화목 (교제)하길 원하신다. 먼 데 있는 자나 가까운 데 있는 자나 ‘이 둘’이 하나 ‘우리’가 되어 한 성령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하신다.

예수님이 평강(평화, 화평)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우리는 노래한다.  그리스도 주님은 화평이시다. 성도사이와 성도와 성부 하나님 간의 화평을 이루신다. 그리고 우리로 먼 데 있는 사람,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께 순종하셔서 화평으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도 예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로 옷입고 땅 끝까지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화평! 성탄절에 울려퍼져야 할 노래다.

음!

그러나 세상은 거꾸로 간다. ‘이 둘’이 셋으로 넷으로 각각으로 흩어지는 세상에 산다. 너희는 세상의 정의라 너희는 세상의 공의라. 정의가 맛을 잃고, 공의의 빛을 가리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의 열심

이사야 9:1-7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2)

‘생명을 주는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라고 세례자 요한은 증언했다. 그리고 덧 붙였다. 세상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그는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우리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불순종하게 하는 악한 영을 따라 살았다. 흑암에 행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빛이 비쳤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은 단순히 삶의 곤고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의가 창궐한 세상을 뜻한다. 그래서 노예로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되곤 한다. 고통받고 멸시받는 삶이다. 불의하기 때문이다.

성탄절은 참 빛이 세상에 오심을 기념하는 날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의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성부 예수님을 이땅에 한 아이로 보내 주셔서 흑암의 권세아래 신음하는 우리에게 다시 생명의 빛을 비춰 주신 (아직도 비춰주시는) ‘주님의 열심’을 되새기는 날이다.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셨지만 (변방나라에서 아기로 태어나셔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세상은 알아보지 못한다. 이천여년 전에 주님은 이렇게 오셨고 빛으로 사시면서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도록 ‘주님의 열심’을 이루셨다.

‘주님의 열심’은 지금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주님의 열심으로 살아야 할 이유다. 성탄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정의과 공의로 살아갈 힘을 구한다.

하나님나라는 ‘정의와 공의로’ 영원히 보존되는 나라다.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이 떠오르는 이유는? 정의와 공의는 소금과 빛으로 비유된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은 정의와 공으로 사는 것이다. 성탄절은 정의와 공의로 영원히 보존되는 하나님나라를 굳게 세우시는 주님의 열심을 되새기는 날이다.

임마누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 약속, 예언의 내용은 같은데 상황과 반응은 사뭇 다르다. 시리아와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 앞에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 왕에게 대적들의 연합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대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예언의 말씀이 미덥지 않으면)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하스는 불신하고 앗수를 의지하고 만다. 이때 불신하는 (징조를 구하지 않은) 아하스에게 주신 말씀이 첫번째다. 이 불신에도 주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때 요셉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두 예언의 촛점은 동정녀 탄생이 아니다. (특별히 이사야의 예언은 동정녀 탄생과 상관이 없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만이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유다왕 아하스는 악한 왕이었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불순종했다. 요셉은 예수님 족보 제일 마지막에 이름을 올렸고 그는 순종했다. 그러니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고/안믿고 문제가 아니다. 대신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은 ‘믿고/안믿고’를 떠나 주님의 백성들에게 임마누엘을 약속하셨다. 임마누엘의 약속을 누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가져온다. 동정녀 탄생을 믿고 안믿고가 아니라 임마누엘의 약속을 따라 사느냐가 중요하다.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대신 자신과 세상을 의지 하는 것이 불신이다. 임마누엘의 삶에는 동정녀 탄생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해야 할 길이다.

의로운 사람 요셉. 그는 자신의 생각(가만히 끊고자 함)을 버리고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였다.  (오늘날 세상에서 이만한 기적이 또 있을까?) 의롭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지위고하를 따지지 않고 의로운 사람의 집안을 통해 주님이 오셨고 온전하고 완전한 (흠 없는) 의로우신 분으로 사셨다.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