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7-21

스가랴 1:7-21

첫 예언후 두달정도 지나 하나님께서 다시 스가랴에게 환상으로 말씀하셨다.

첫번째 환상은 현실상황 (11-15)과 예루살렘 재건(16)과 번영(17)에 관한 내용이다.  말을 탄 사람들이 세상을 두루다녀보니 세상나라들은 제멋에 잘살고 있는데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은 여전히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다. 천사는 주님께서 이방나라를 사용하셔서 불순종의 유다를 벌하셨는데 이방나라들이 유다백성을 너무 심하게 대하고 있고, 포로기간이 이미 7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하나나님께서는  다시 자비를 베풀어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번성하게 되도록 축복하시며 그 가운데 다시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두번째는 ‘네 뿔과 네 대장장이 환상’이다. 네 뿔은 유다를 짓밟고 유다 백성을 흩어버린 이방나라들이며 네명의 대장장이는 네 뿔 이방나라를 무찌를 사람들이다. 다시말해 이방나라를 벌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나라의 승리를 뜻한다.

제멋에 잘 사는 (평안하고 조용한) 나라에도 짓밟히고 고통받고 흩어진 (유다) 백성들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환상중에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과 대화 하신다. (하나님과 대화하시면서 환상을 설명하는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있는 그 사람은 아마도 그리스도 주님이실 것이다.) 화석류나무는 히브리어로 에스더의 히브리 이름 ‘하닷사’와 발음이 비슷하단다. 머틀나무라고 하는데 ‘의’로움을 뜻한다고 한다. ‘의의 나무’들 사이에 계시는 삼위 하나님께서는 제멋에 잘사는 사람과 불쌍한 사람이 구분되는 나라를 싫어하신다.

네개의 뿔, 뿔은 권세와 영광과 힘과 교만을 상징한다. 세상나라의 특징이다. 화려해 보여도 내면을 보면 불쌍한 사람이 핍박받고 있다. 이렇게 평안하다 조용하다 하는 나라들을 대장장이를 통해 벌하실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넘치도록 풍부한 나라요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나라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택하신) 나라다.(17)

내가 사는 프놈펜. 평안하고 조용하다. 훈센의 32년 통치가 낳은 산물이다. 지난달 야당을 해산시켰는데도 잠잠하다. 이곳 사람들은 이 평안함과 조용함에 안주하며 산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구석구석에서 신음하는데 잔치소리만 들린다. 풍부함만 추구하지 하나님의 위로와 통치를 (택하심을) 기대하는 사람은 안보인다.

오 주님! 이 땅 캄보디아에도 주님의 환상을 보는 자들이 일어나게 하소서. 제멋에 잘사는 대평성대(大平盛代)가 아니라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 태평성대 (太平聖代)가 오게하소서.

스가랴 1:1-6

스가랴 1:1-6
 
다리오왕 제이년에 팔월에 선지자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다리오 왕 때니 에스더시대보다 연대가 조금 더 빠르다. 에스더는 무슨 연유였던 간에 귀환하지 않고 포로지에 남아있던 유다인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다면 스가랴는 돌아온 유다인들의 이야기다. (배경을 꼼꼼히 따져봐야 헛소리를 안적는데… )
 
예언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다라고 시작한다. 당대가 아니라 과거 조상의 불순종으로 시작한다. 너희 조상들은 내게 돌아오지 않아서 내가 진노했는데 너희는 내게로 돌아와라. 내가 다시 너희편이 되겠다. 너희 조상들처럼 불순종하지 말아라. 너희 조상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아 결국 뿔뿌리 흩어지고 말았쟎느냐. 선지자가 언제까지 회개하라고만 외치겠느냐. 너희 조상들도 내게 돌아오라는 똑같은 말을 들었지만 각기 제길로 가서 결국 포로생활이라는 벌을 받았다. 포로에서 돌아와서야 주님께서 조상들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내리셨다는 것을 깨닫지 않더냐.
 
주님께서는 지리적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이제는 영적인 포로상태에서 돌아오라고 명하신다. 포로국에 남아 제국에서 살지 않고 예수살렘으로 결심하고 돌아왔다면 삶의 방향도 바뀌어야 한다고 스가랴서의 서문을 여신다.
 
이 아침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 하나 주님편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편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아오시는 길이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눅 15:20 새번역)
 
주님은 우리가 돌이킨만큼만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달려오신다. 아들은 먼나라에서 지리적으로만 고향을 향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아버지께 순종하기로 마음의 방향도 바꾸고 왔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는 ‘종’이 되겠다는 결심이고, 종은 ‘순종’하는 자다. 그런데 순종하러 왔더니 자녀 삼아 주신 것이다.)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스가랴를 통해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결국은 사역이 아니라 순종의 삶이다. 청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