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2:18-25

사도행전 12:18-25

날이 새자 (예루살렘은) 베드로의 탈옥으로 발칵 뒤집혔다. 헤롯은 군대를 풀어 찾아보았으나 베드로를 볼 수 없자 애꿎은 파수군만 심문하고 죽여버렸다. 그리고 헤롯은 (종교적 중심) 유대를 떠나 (행정 중심 도시) 가이샤라로 갔다.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위해 베드로를 죽이려 했지만 결국 행정적 무능함만 드러났다.) 헤롯은 두로와 시돈에게 화풀이를 하였고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의 노를 풀기위해 큰 대회를 열어서 헤롯을 초청해 연설을 들었다. 사람들은 헤롯의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칭송했고 헤롯은 우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였다. 주께서 헤롯이 벌레에 먹혀 죽게 벌하셨다.

고난과 핍박 중에 하나님 말씀은 흥왕하였다. 성도의 수가 느는 것을 하나님 말씀이 흥왕하였다고 적었다. 말씀을 읽지 않는 교인들의 수가 더해자는 것은 하나님 망씀이 흥왕하는 것이 아니니, 오히려 교회의 쇠락이다.

흉년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부조를 전한 바나바와 사울이 마가 요한을 데리고 돌어갔다.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지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잠29: 18) 누가는 핍박가운데 성장하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니라 (믿는 자의 수가 많아 지더라)’ 라고 썼다(행12: 24).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해지고 자기 소견대로 행한다. 그러니 단순히 (말씀을 배우지 않는) 교인 수가 느는 것은 교회의 성장이 아니다. 오히려 쇠락의 전조다. 얼마나 말씀을 가르치고, 얼마나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가 교회를 자라게 한다.

사도행전 12:1-17

땅끝을 향하여

‘그 때’(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고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성령 안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때)라고 해서 핍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정치적 핍박아래 놓였다. 유대인의 온전한 지지를 받지 못한 헤롯 왕가는 교회를 핍박함으로 유대인들의 지지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의 형제 사도 야고보를 죽였다. 유대인들의 반응이 좋자 베드로도 잡았다. 이왕이면 명절기간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이 많이 모였을 때, 유월절/무교절기간에 잡았다. 그리고 유월절 후에 백성들 앞에서 대대적으로 처형하려고 옥에 가두었다. 교회는 베드로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베드로가 백성들 앞에 끌려나가 죽기 전 날 밤에도 베드로는 감옥에 누워서 (편히) 자고 있었다. 두군인이 양옆에서 지키고 있고 파수꾼들은 옥문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의 사자가 나타났다. 주의 사자는 베드로를 깨웠다. 착고를 벗겨주었다. 천사는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으로 하였다. 베드로는 천사가 하라는 대로 했다. 베드로는 천사의 말대로 겉옷을 입고 천사를 따라 갔다.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천사를 따라 파수꾼들을 지나고 저절로 열린 쇠문을 통과해 한 거리를 지났다. 그제서야 베드로를 인도하던 천사는 떠났고 베드로는 정신이 들어, 주께서 주의 사자를 보내어 자신을 헤롯과 유대백성들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 주신줄 알았다. 그는 즉시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헤롯은 대대적으로 베드로를 처형하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조용히 구해 주셨다.)

베드로는 문을 두르렸다. 베드도의 구속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문을 잠그고 모였을 것이다. 마침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기쁜나머지 문을 열어주는 것을 잊어버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들어가 베드로가 왔다고 전했다. 기도하던 사람들은 로데의 말을 믿지 않았다. 로데가 미쳤다고 했다. 로데가 진짜라고 강조하자 베드로의 천사라고 했다. 베드로는 계속 문을 두드렸고 그들은 문을 열었다. 베드로였다. 놀랐다. (우리는 종종 결과를 알지 못하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을 모른다. 우리 생각 밖의 선물에 대해서는 무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길 원하신다.)  예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일을 전하라고 부탁한 후 다른 곳으로 떠나 갔다.

스데반의 순교로 불거진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에서도 사도들은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여전이 사도들을 옭아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성도들을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를 방문하여 그들을 안수하고, 사마리아 지방을 다니면 복음을 전하였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고넬료를 만나 이방인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사도 야고보의 순교에서도 배울 수 없었던 교훈을 베드로는 자신의 투옥과  주의 천사를 통한 기적적 탈옥을 경험함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벗어나야 함을 깨달았다. 베드로도 땅 끝을 지향해야 했다.

지도자가 있는 곳이 중심이지, 중심에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사도 야고보의 순교는 오순절 이후 얼마나 지났을 때 일어난 사건일까? 대략 10년정도 지났다고 본다. 숨가쁘게 읽어오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강산이 한번은 변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야보고 역시 이베리아 반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당시 땅 끝 스페인 땅에까지 갔다 왔다는 것이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는 순차적이라기 보다. 온 땅에서 증인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지리적 땅 끝보다 문화적 민족적 땅 끝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사도행전 11:19-30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성도들이 온유대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다 (고넬료 사건과 베드로의 예루살렘 보고회의 영향이었을까?)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서는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했다.  주의 손이 말씀을 전하는 자와 함께 하셔서 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 예루살렘 출신들의 한계를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들이 이겨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서 헬라인들도 주께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구브로 출신) 파송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성도들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권면은 능력있었다.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다. 교회에 더하여 진 것을 ‘주께 더하여졌다’라고 표현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요,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수가 늘어나면 문제는 항상있다. 바나바는 이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마침 안디옥에서 가까운 다소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다.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바나바와 함께 일년동안 늘어난 성도들을 가르쳤다. 이들의 가르침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안디옥에서 가까운 다소 출신 사울이 섬사람 구브로 출신 바나바보다 안디옥을 더 잘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혹은 로마 시민권자 사울이 헬라인을 가르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바야흐로 이방인 교회가 성장하고 있을 그 때,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다. 그 중에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성령에 감동되어 천하에 큰 흉년이 들것을 예언했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 (성도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편에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보냈다. ‘천하에 큰 흉년’이라면 안디옥도 분명이 흉년의 피해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성도들이 흩어져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모든 물건을 통용할 만큼 큰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을 따라 나눠주며’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 흩어진 성도들, 흩어진 교회들 사이에서도 이뤄진 예라고 생각된다. 각 지역교회, 개 교회는 교회 이기 주의를 벗어나야 할 이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

사도행전 11:1-18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그런데 유대에 남아있던 사도와 형제들의 관심은 베드로가 이방인들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방인들을 무할례자라고 지칭했다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성령이 명하신 사건이라고 밝혔다. 동행한 여섯명의 증인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방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받을 말씀응) 가르치기 시작할 때에 성령이 임하셨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막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유대에 남아있던 사도와 형제들은 잠잠할 수 밖에 없었다. 반박 대신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다 .

구원은 하나님 말씀을 받는 것이요, 생명을 얻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에 차별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이방인과 함께 먹고 마신 베드로의 행위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10:34-48

베드로의 첫마디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였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를 출신에 상관없이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음은 할례자나 무할례자 하나님 앞에서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의롭게 사는지에 관심을 두신다.

성령은 가난한 자와 가진 자가 함께 물건을 통용하게 하셨다.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의 불통도 소통으로 바꾸셨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성도들도 하나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방인들 마져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게 하셨다.

성령충만은 성도들 사이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우째 당짓기를 그리 좋아하는지… ㅠㅠ

서로 사랑하라! 말씀이 가르치는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