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부터 야곱의 죽음까지 열몇절에 담아내는 스데반. 그가 왜 헬라어 성경공부반의 선생으로 뽑혔는지 이해된다. 헬라어 뿐만아니라 히브리어에도 능통했을 터, 들으라 부형들이여라고 대제사장의 심문에 스데반은 대답을 시작했다.
6장에서 스데반이 모함받아 잡힌 이유는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째 부활로 참 성전되셨으며,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것을) 모세의 율법을 고치시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성전이나 율법으로 자신의 변호를 시작하지 표않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했다. 율법보다 먼저 주어진 언약을 상기시키고 율법보다 상위법인? 할례를 언급했다. 성전보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함께하심이 먼저요, 율법보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먼저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6장에서 누가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말한다. 누가는 스데반을 주의 사자에 비유하고자 이 표현을 넣었을 것이다.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주의 사자, 한밤에 목자들에게 나타났던 주의 천사. 스데반은 단순히 자기 변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사자가 되어 ‘복된 소식’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한다.
주의 사자로서의 담대함은 대제사장 앞에서 감히 ‘들으라 부형들이여’ 라고 마치 판결문을 낭독하는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누가 피고인지, 누가 재판관인지 뒤바뀐 모양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이미 복음의 담대함을 간접체험하지 않았을까?
이래저래 많은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오늘 학생들과 찬양하며, 경배하며, 말씀 듣고 기도하는 일박 수련회 날이다. “하늘에까지 자라라”가 주제다. 함께 하늘에까지 자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