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17-33

말씀도 환상도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으로 깨달아야 한다. 환상에 대한 베드로의 의아함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방문으로 깨달아 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해 주셔서 해결된 것이다. 베드로는 순종하고 부정하다 여겼던 이방인들을 맞이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은 자신의 방문 목적을 말하면서 고넬료가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서 유대 온 족속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받아서 베드로를 초청했다고 방문목적을 말했다.

베드로는 다음날 (밤이 늦어 하루를 유숙했는지, 아니면 고넬료 이야기를 듣는라?) 그들을 따라 가이사랴로 출발했다. 욥바시내에 있던 형제 몇명도 함께 갔다.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들어 갈  때 고넬료는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맞이했다. 베드로가 숙여 고넬료를 일으키며 나도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에게 유대인인 자신이 이방인 집에 들어와 교제하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이라 (꺼리낌 없이) 왔다고 말했다. 고넬료도 베드로를 초청한 이유 역시 하나님의 사자, 천사의 지시 사항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과 더불어 주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아야 한다. 깨끗함과 부정함은 오직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사항이다. (예수님도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치셨다.) 이방성도와 유대인 성도간의 화목이 없이, 교회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수 있을까?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었고,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 제자들이 하나되었고, 유대인과 사마리아 성도들이 하나 되었고, 이제는 이방인도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된다.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인도 함을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령은 성도들 사이에 가난한 자와 부자의 벽을 허무셨다.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벽도 허무시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벽도, 그리고 이방인과의 벽도 허무신다.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한다. 성도들 사이에 있는 막힌 담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성령의 도우심 만으로 허물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신 길이다.

 

사도행전 10:1-16

고넬료와 베드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 경건한 사람. 누가는 그의 경건을 집안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함과 백성을 많이 구제함과 하나님께 항상 기도함으로 설명한다. 이런 고넬료가 오후 세시 기도시간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을 경외 (두려워) 하는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생명책에 기록되어 지워지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지/금/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해변가에 있는 가죽업을 하는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초대하라고 명했다. 천사가 떠나자 고넬료는 하인 둘과 경건한 부하 한명에게 주의 사자 (천사)의 말을 일러주고 욥바로 보낸다.

다음 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다달았을 때 베드로는 오후 1시 기도시간에 지붕에 올라가 기도했다. 시장기를 느낀 베드로는 음식을 요청했고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다.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에 유대인에게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동물들이 있었는데 하늘로부터 잡아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베드로는 이런 것들을 먹지 아니하였다고 대답했다. 다시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환상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려졌다.

항상 어려운 본문이다.

고넬료. 그는 성도인가? 그의 경건에 부족함이 있는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자주 구제하고 기도시간을 꼬박 지키는 사람. 주의 천사는 이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결국은 성도의 교제다. 고넬료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 속되다. 깨끗하지 않다라는 편견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에서 나온다.

베드로는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방문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다. 룻다, 사론, 욥바에서. 그러나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가이사랴에는 (아직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곱 헬라파 유대인 중의 한명인 빌립이 이미 가이사랴에 복음을 전파한 후였다. 그렇다면 고넬료도 이미 하나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다만 천부장의 명령하에 있던 백부장이라 아직 세례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초청하게 하고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유대인과 헬라인도 차별없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방전도는 이미 빌립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체적인 사귐, 성령안에서의 교제는 이제 시작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다.

 

사도행전 9:32-43

‘그 때에’로 시작한다. 그 때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던 때다. 이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녔다. 왜? 첫번째는 복음전도 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의 복음전도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대신 성도들을 든든히 서가게 한 사건이 나온다. 첫번째

룻다에서 중풍병으로 8년을 누워지내던 애니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해 주었다. 이를 통해 룻다뿐 아니라 인근 사론에 사는 사람들도 주께로 돌아왔다.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는 교회에 믿는자의 수가 더해진다. 교회가 자란다. 두번째

욥바에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하던 다비다 (도르가)라고 부르는 여제자가 죽었다. (사람들은 도르가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눕혀 두었다.) 욥바에 있던 제자들이 가까이 룻다에 베드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러왔다. 욥바에 온 베드로는 다락에 있던 사람들을 내 보내고 혼자 무릎꿇고 기도한 후 다비다를 살렸다. 베드로는 다비라를 일으켜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비다가 다시 살아 난 것을 보여 주었다. 욥바에서도 이 사건을 인해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

첫번째 두번째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베드로의 복음전도 사역이 아니다. 교회를 든든히 서 가게 하는 사건이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갈 때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된다. 복음전도도 필요하지만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것도 중요하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가기 위해서는 주를 경외함으로 성도들 간에 피차 복종함 (서로 사랑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의와 평화와 희락 (기쁨)의 나라지만 당연히 희노애락이 다 있다. 성령의 위로가 함께 해야 한다. 성령께서 성도들간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오늘도 성도는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내실에 충실해야 하는데, 내실이 무너지는 교회들, 성도들의 수가 줄고 ‘가나안’이 되는 이유가 아닐까? 그 때에 베드로 사도는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찾아 다니며 주를 경외함으로 성령의 위로함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았다.

 

그 때에 베드로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룻다(와 사론)와 욥바지역이다. 전도여행이었을까? 누가는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에대한 심방임을 강조하는 듯 하다.

‘그 때’는 앞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1)와 연결된다.

애니아를 고치고 도르가(다비다)를 살렸다. 이 사건들로 룻다와 사론, 욥바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고, 주를 믿었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가야 교회가 자란다. 주를 경외함은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로 드러난다. 성령의 위로함은 핍박받는 교회에 풍성히 부어진다. 교회가 건강하면 교회는 자란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 24)

사도행전 9:19-31

사울이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진 후 첫번째 기록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었다는 것이다. 나에게 반복되는 가르침은 성령충만의 외적 특징은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다.  며칠동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을 맛본 사울은 즉시로 회당을 방문하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했다. 당연히

사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놀랐다. ‘그리스도’의 도들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온 사람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도를 전파하다니. 그러나 사울을 더 힘을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했다. 유대인들은 놀람을 너머 당혹했다. 급기야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했다. 사울에게도 유대인들이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며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이 알려졌다. 스데반과 같이 순교의 길을 걸을 것인가? 사울이 다메섹에서 며칠이나 예수가 그리스도라 전도했을까? 사울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생겼다.

사울의 제자들은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문이 아니라 성벽을 너머 탈출시켰다. 사울은 예루 살렘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제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은 사울의 제자 됨을 믿지 않았다. 다행히 그곳에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가 사울의 회심과 사울의 전도자로의 행적을 증언해 주었다. 그제서야 사울은 제자들과 교제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했다. 유대파 사울이었지만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과도 함께 전도 (증언도 하고 변론도) 했다. 사울의 영향이 얼마나 컸으면 예루살렘에서도 사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기세등등해졌다. 다시한번 스데반과 같이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으나 이번에도 형제들이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를 거쳐 다소로 보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 지니라. 사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라는 누가의 기록은 교회에 대한 박해가 사라졌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을 받아 흩어졌으며 사울 역시 도망다녀야 했다. 교회가 든든히 서갔다는 의미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더 건강한 공동체로) 지어져갔으며,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공동체에 들어오는 성도가 더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고 했다. ‘그리하여’는 ‘핍박이 있어’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간다는 의미가 요즘과 참 다름을 새삼 깨닫는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는 교회공동체! ‘

 

사도행전 9:10-19

사흘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사울. 그에게도 필요한 것은 성령충만이었다. 사마리아 성도에게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필요하다.

사울이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던 사흘, 주님께서서는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부르셨다. 주님은 사울이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기도중에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아나니아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생각, 즉 사울은 ‘그리스도’의 도에 해를 끼쳤고 또 해를 끼칠 것이라고 주님께 아뢨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가라’고 하셨고 아나니아는 순종했다. 제자는 순종하는 자다.

제자 아나니아는 사울을 안수하며 “형제 사울아”하고 불렀다. 성령 충만의 역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임을 다시 본다. 핍박하던 자를 , 핍박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힘은 성령충만 외에 다른 곳에서 나올 수 없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사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육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엉적인 눈도 뜬 것이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졌다고 누가는 기록한다. 예수님을 만나고도 보지 못할 수 있고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한다고 해도 쇠약할 수 있다. 성령충만하여 성도가 서로 교제하니 강건해진다. 강건하니 서로 교제하게 된다.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하는 이유가 점점 더 분명해 진다.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함이다. 복음 전파를 너머,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함께 살기 위함이다.

// 성령충만은 제자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