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 :37-53

아이러니다. 이스라엘은 ‘모세’ 라는 이름을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스데반을 고소할 때 모세와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했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지자로 세우셨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얼굴과 입으로 삼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조상 때부터 모세에게(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다) 불순종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 자신에 대한 불순종이라 하셨다. 결국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모욕죄는 (스데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짓고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이름으로’ 에는 은혜와 감사, 그리고 순종이 동반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열려라 참깨’ 와 같은 주문이 결코 아니다.

성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백성가운데 거하시길 원하시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계시지 않는다. 성전을 완공한 솔로몬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간구를 들어달라고 했다. 성전에 대한 이해부족을 스데반은 이 모든 것이 조상때부터 성령을 거스려서 생긴 결과라 한다.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면서 성전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밝히는 것이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가운데 거하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스데반이 만약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고 있는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변론을 녹음해서 다시 듣는다면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까. ‘어 내가 이렇게 말했어.’

“너희가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는 결론은 항상 유효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7:17-36

스데반은 거짓 증언을 통하여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고발 당했다. 스데반은 자신이 (구약에서 배운) 모세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귀아프게 들은 모세의 사십년 사십년 사십년의 원조가 스데반이다. 첫 사십년

모세는 죽음의 땅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태어났다. 고작 백일도 안되어 죽음의 강에 버려졌다. 그러나 바로의 딸의 아들로 (모세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아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다.

모세는 (혈통족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 자기 민족을 챙기려고 했다. 나이 사십에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인정받고자 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구원자는 고사하고 재판관도 못되었다. 결국 살인자로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다. 두번째 사십년.

모세는 이방 땅에서 떠돌이 목자였지만 평범한 가정생활을 했다. 스데반은 두번째 사십년을 ‘미디안에서 나그네로 아들 둘을 낳았다’로 함축했다. 사십년이 차자 하나님께서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구원자로 부르셨다. 마지막 사십년

모세는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줄줄이 꿰고 있을 이야기에서 스데반이 강조한 것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32절

가시나무 떨기 불꽃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를 주목했다.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고발당한 스데반은 모세와 하나님은 동격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은연중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수련회 새벽이다.

사도행전 7:1-16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부터 야곱의 죽음까지 열몇절에 담아내는 스데반. 그가 왜 헬라어 성경공부반의 선생으로 뽑혔는지 이해된다. 헬라어 뿐만아니라 히브리어에도 능통했을 터, 들으라 부형들이여라고 대제사장의 심문에 스데반은 대답을 시작했다.

6장에서 스데반이 모함받아 잡힌 이유는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째 부활로 참 성전되셨으며,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것을) 모세의 율법을 고치시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성전이나 율법으로 자신의 변호를 시작하지 표않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했다. 율법보다 먼저 주어진 언약을 상기시키고 율법보다 상위법인? 할례를 언급했다. 성전보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함께하심이 먼저요, 율법보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먼저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6장에서 누가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말한다. 누가는 스데반을 주의 사자에 비유하고자 이 표현을 넣었을 것이다.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주의 사자, 한밤에 목자들에게 나타났던 주의 천사. 스데반은 단순히 자기 변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사자가 되어 ‘복된 소식’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한다.

주의 사자로서의 담대함은 대제사장 앞에서 감히 ‘들으라 부형들이여’ 라고 마치 판결문을 낭독하는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누가 피고인지, 누가 재판관인지 뒤바뀐 모양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이미 복음의 담대함을 간접체험하지 않았을까?

이래저래 많은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오늘 학생들과 찬양하며, 경배하며, 말씀 듣고 기도하는 일박 수련회 날이다. “하늘에까지 자라라”가 주제다. 함께 하늘에까지 자라자.

사도행전 6

삼천명이 세례받고 믿는 남자가 오천이 되고… 제자가 많아졌다. 그때 세상 곳곳에서 온 헬라말을 쓰는 유대인들이 본토박이 히브리 말을 쓰는 유대인들에게 불평했다. 자기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졌다는 것이다.

사도들, 제자들이 세상 곳곳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말을 했다고 하여도 예루살렘 공식언어는 히브리어, 아람어이었을 것이다. 언어장벽이 엄연히 존재했다고 봐야한다. 당장 내 경우에도 크마애 직원들과 회의 때 언어장벽이 심하다. 당연히 한국어나 영어로 의사소통이 더 잘되는 직원과 일하는 시간이 많을 수 밖에 없다. ㅠㅠ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헬라말을 쓰는 일곱 명을 세웠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하였는데, 온 무리가 헬라말을 쓰는 일곱 명을 택해 사도들에게 추천했던 것이다. 헬라파 유대인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어를 좀 한다. ㅎㅎ) 문제의 본질이 구제를 차별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에 있었다는 것이다.

소통이 되니 원망(불평) 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지고 제자의 수가 더욱더 많아졌다. 즉 많아진 제자의 수가 구제문제의 본질이 아니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스데반 이야기는 일곱 명의 사역이 단순히 구제관련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는데 스데반, 빌립이 한 몫을 한다. 그냥 집사?가 아니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명중 하나였다. 이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으며, 또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한다. (헬라말을 잘하는) 스데반은 구레네 사람, 알렉산드리아 사람, 길리기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논쟁했다.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이길 수 없었다. 이 스데반을 모함하여 공회에 잡아왔다. 피고석에 있는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그 얼굴에서 빛났을 것이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만은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구제는 (도움을 주든, 받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주된 뜻이겠으나 사역이나 직무로 번역되기도 한다. 사실 초대교회 내에는 가난한 자가 없으니(4:34)라고 누가가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디모데후서에 두 번 이 단어가 사용 되었는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권면할 때 (4:5) ‘직무’로 번역되었고, 바울이 마가가 자신의 일에 유익하다고 말할 때 (4:11) ‘일’로 번역되었다. 즉 구제란 ‘가르치는 일’도 된다.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이 ”우리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했을 때 말씀 ‘사역’에 ‘구제’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음 그렇다면 헬라파 과부들은 ‘사도들의 가르치는 사역’에서 빠졌다고도 볼 수 있다. 말이 안통해서. 설마 사도들이 헬라어 방언으로 가르쳤을까? 히브리파 유대인이 헬라파 과부들을 가르칠 수 없어서 생긴 문제였다. 그래서 헬라어를 잘하는 스데반, 빌립 등 일곱명을 세워 헬라어 성경공부반 교사로 삼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가르침에 차별이 없으니 7절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더 많아지고’ 로 이어진다.

헬라어 성경공부반도 개설해 주세요.

//그러고보니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로 구제(사역)하게 하심에 감사.

사도행전 5:27-42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도들은 다시 끌려갔다. 생명의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었기에 자발적으로 갔을 것이다. 대제사장이 왜 ‘메시야(그리스도)’라는 유대교의 특허권을 침해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왜 자신들의 잘못이냐고 따졌다.

배드로와 사도들은 ‘그리스도’이름 사용에 대한 특허권은 애당초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다시한번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책임을 종교지도자들에게 돌렸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구주로 삼았다고 변론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성령께서 동일하게 증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법정은 베드로와 사도들의 변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로 사형선고를 내릴 기세였다. 한편 어디에나 합리적?인 중도?가 있다.바리새인 가말리엘이 그런 부류였다. 적어도 지금 법정은 대제사장과 사두개파가 주도 하고 있었는데 바리새파 가말리엘이 끼어든 모양새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법정 밖에 나가 기다리게 하고, 지금 법정에서 내릴 판결을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다와 갈릴리의 유다를 예를 들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리스도’ (주의 이름)에 대한 특허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렇지만 크게 노했던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구속력이 없는) 경고를 하고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핍박 (능욕)받는 일을 합당하게 여겼다. 아니 기뻐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a)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을 것이다. 어쩌면 온 몸이 멍든채 법정을 나왔지만 마음은 더 당당했다. 그리고 어디서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더 담대히 가르치고 전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