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12-26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병고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신 사역이 사도들을 통하여서도 이어진다. (12~16)  당황한 것은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였다. 분명히 종교특허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사도들을 통해 경고하였건만 백성들의 칭송은 종교지도자들이 아닌 믿는 사람들이었다.

종교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풀어주었다. 풀어준 이유는 (잘 살라고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말해야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 삼시, 제구시 (오전 오후로) 성전에 모였었는데, 옥에서 풀려난 후 주의 사자의 명을 따라 새벽부터 성전에 가서 가르쳤다.

종교지도자들은 정치지도자들 (원로)와 결탁해서 사도들을 재판정이 불렀으나 사도들은 이미 성전에서 가르치는 중이었다. 성전관리가 부하들과 함께 사도들을 잡아 재판정에 세웠다.여론이 사도들 편이라 강제로 끌고 오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도의 입장에서도 다시 한번 지도자들 앞에서 생명의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고자 순순히 왔을 것이다.

구원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을 병에서 낫게 하신 것도, 가난에서 부하게 하신 것도, 지혜를 주신 것도 잘살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사도들을 다시 잡히도록 하셨겠는가? 하나님나라에서 잘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나님나라의 삶을 전하라고 하신다.

주의 사자는 옥문을 열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의 성령으로 제자들의 입을 열게 하신다.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엡 6:19)

내가 부탁해야 할 기도제목이다.

 

사도행전 4:32-5:11

감출 수 없다

사도행전 2장 마지막 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반복해서 기록되었다. 특별히 나눔을 통해 가난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먹고 마시는 나라가 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나라로 세워져 갔다. ‘바나바’라 불리는 요셉이 자기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는 구체적인 예까지 들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모양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가 이어진다. 요셉이 사도들에게 위로자라는 칭찬을 받은 것이 (요즘으로 하면 안수집사나 장로로 장립받는 것이) 부러웠을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경건의 모양만 흉내내었다. 부부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문제는 ‘다’ 가 아니라 일부를 감추고 ‘얼마만’ 가져갔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알고 아나니아를 책망했다. 성령을 속였다.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고 밝혔다. 성령을 거스리는 잘못은 돌이킬 수 없다. 아나니아는 죽임의 형벌을 받았다. 부창부수인가?

세시간 후 삽비라가 사도들 앞에 섰다. 삽비라는 남편 아니니아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땅을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물었고 삽비라는 ‘예’ 라고 대답했다. 결국 삽비라도 죽임의 형벌을 받았다. 성도들뿐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해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큰 두려움에 빠졌다. 당연히 우리도 두려워해야 한다.

천국은 자기 소유 전부를 팔아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아무리 가난해도 자신의 소유 전부를 팔아 사야할 보화가 묻힌 밭이요, 값진 진주가 하나님나라다. 두 렙돈밖에 없던 과부도 자기 소유 전부를 드렸다. 일부를 감추고 얼마간으론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없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경건의 능력은 공동체를 살리지만 경건의 모양만 있으면 공동체를 상하게 한다. 곪은 부분은 도려내야 한다.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마다 순종해야 한다.

사도행전 4:13-31

제사장,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 사두개인,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전문가처럼)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놀랐다. 더군다나 십자형을 받은 예수를 따르던 무리였었다면 당연히 두려워서라도 어디 숨어야 했는데 당당했다. 무엇보다도 앉은뱅이였던 자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서있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문가처럼 담대하게 말했다. 메시야 구세주에 대해서 성경을 풀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랍비였다. 앞에서 언급한 제사장,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은 랍비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소위 엘리트교육을 받았다. 박사학위도 있고 교수직함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감히 어디 가방끈이 짧은, 아니 대학근처에도 못가 본 사도들이 가르치려 드니 적지아니 당황했을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 였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라 이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막 6:3) 라는 평가을 받으셨다. 사도들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똑같이 반복된다.

저들이 내린 결론은 라이센스가 없으면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격이 아니라 자격증이 없으면 권리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 예수님의 가르침은 허가 받지 않은 내용이니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다. 종교기득권자들의 특허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문제를 세상법정이 아닌 하나님 앞으로 가져갔다.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할 권리가 있다. 최상위 법을 들고 나온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촛불을 들고 모인) 백성들 때문에 저들은 어쩔 수 없이 베드로와 요한을 석방할 수 밖에 없었다. 백성들은 이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누가는 나음을 받은 앉은뱅이의 나이가 사십여 세나 되었다고 사족을 달았다. 그는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거의 한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왔던 것이다. (물론 고침을 받기까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석방되어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 성도들에게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전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세상법정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위협가운데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위협가운데서도 치유의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자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성령충만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나라)의 큰 일을 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사도행정 4:1-12

예수 그리스도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에 대해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경건과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이 낫게 했다고 자신들에게 쏠린 백성들의 주목을 주님께로 돌렸다. 이때 종교지도자들, 제사장,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 그리고 사두개인와서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했다고 베드로와 요한은 잡았으나 밤이 늦어 일단 가두었다. 그럼에도 믿는 자의 수가 더 늘어났다.

다음날 재판이 벌어졌다. 부활을 가르쳤다고 두사람을 잡아들인 사두개인들이 포함된 무리들뿐 아니라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총 출동해서 심문했다.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답을 했다.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10-12 새번역)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십자가고 그리스도는 부활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도 혈육이 아닌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알게하셨듯이 오늘 대답도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답이 있다. 다른 이름은 없다. 작년 한해를 강타한 루터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십자가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구원(나음)을 받았았다. 요한복음 사건에서 눈 뜬 맹인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는 고백을 했다. 그는 육신의 눈도 떴지만 믿음의 눈도 떴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결코 보지 못한 믿음이었다. 그 사건의 반복이다. 믿음이 없이는 본다고 하여도 맹인과 다름없다. 차라리 맹인이 되었더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래로 있느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 다시 울려퍼진다.

종교적 가르침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 답은 ‘하늘의 권세’, ‘예수 그리스도’다.

사도행전 3:11-26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나은 사람과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 개인의 경건과 능력에 주목하자 베드로가 반문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고쳤고,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 낫게하였다고 선언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주님만의 이름이 아니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단순히 소망을 담은 예수라는 이름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가 되신 것이다. 소망이 이뤄진 것이다. 이 예수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바로 그 그리스도 예수라고 밝혔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아 새롭게 되라고 한다. 새롭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 예수가 주인으로 오신다. 물론 이 과정들은 순차적이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가 오셔서 이 일을 이루신다.

세상이 왜 우리를 주목하는가? 어떻게 나의 경건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이 주목받도록 할 수 있을까? 자꾸 내가 세상적으로도 잘 되어야 한다는 유혹이 있다. 내가 경건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유혹.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경건의 모양이나 능력이 아니다. ‘경건의 능력’이다. 이것은 예수의 이름만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다. 능력이 아니라 믿음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