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9:11-22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먹고 마시는 (육체의 예법을 따르는) 세상 나라의 대제사장으로 매년 드려야 할 속죄제를 드리신 것이 아니다. 대신

의와 희락과 화평인 하나님나라의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사람이 지은 장막(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제물의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온전한 성소 하늘 보좌로 단번에 들어가는 완전한 피흘림이었다.

제물의 피로도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다 하니,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이것이 새언약이다. 매년 갱신해야 하는 옛언약 대신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은 것이다. 새언약도 옛언약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피로 확증했다.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유언으로.

구원이란 죽은 행실에서 (먹고 마시고 씻는 육체의 예법을 따지는 세상나라에서) 돌이켜 (개혁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의와 희락과 화평인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누가복음 23:33-4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셨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핑계가 아닌 사실이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오해하였다. 유대 백성들은 그리스도면 자신도 구원하라고 조롱했고 (로마) 군인들은 왕이면 자신을 구원하라고 비웃었다. 누가는 구원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서 예수님 좌우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구원은  하나님이 던진 그물에 어쩔 수 없이 걸려드는 것이 아니다. 한 행악자가 비방한 것 처럼 아무곳이나 구원의 그물을 던졌는데, 그속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행악자는 알았다. 자신은 깊은 곳도 배 우편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물이 던져질  아무런 조건이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은 깊은 곳도, 배 우편에에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물고기라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골고다에서 한 행악자는 구원의 낚시줄에 달린 바늘을 물지 않았지만 다른 행악자는 낚시 바늘을 덥석 물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것이 한 행악자를 골고다(죽음)에서 낙원(생명)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시며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다. 그리고 숨지셨다. 우리가 할 것이라고는 작은 고통을 감내하며 구원의 낚시 바늘을 덥석 무는 일이다. 구원의 그물이 던져지지 않을 곳에 있을지라도 구원의 낚시줄은 드려진다. 은혜다. 덥석물어야 할 은혜다.

광야에서 모세가 든 놋뱀을 봐야 살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인자를 봐야 한다. 그리고 덥석 물어야 한다. 놋뱀처럼 한번 보기만 해야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봐야 한다. 구원이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임마누엘!

마태복음 26: 47-56

예수님이 잡히셨다. 예수님은 엘리사를 둘러쌌던 불말과 불병거보다 더 많은 열두 군단의 천군의 대장이셨지만 순순히 잡히셨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엘리사가 사환에게 한 것처럼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왕하 6:16)”

제자들의 눈을 열어 열두 군단의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주셨으면 어땠을까? 칼과 몽치를 든 무리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게 열두 군단 천사가 아니라 칼과 몽치니 어쩌랴. 세상 셈법은 분명하다. 도망가야지. 영안을 뜨게 해주실 때까진.

마태복음 26:36-4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라고 하셨으면서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데리고 저기로 고민하시며, 슬피하시며 갔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으라 하시고 몇걸음 더 나아가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만에 하나 가능하다면 아버지의 뜻을 바꿔 주십시오. 그래도 내 기도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돌아와 제자들이 졸고 있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너희도 잠깐이나마 나와 기도해 달라고 하셨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아마도 예수님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 달라고 하신 것 같다. 예수님은 영적으로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감당해야 할 육신의 약함도 아셨다.) 그리고 다시 몇걸음 나가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움직여야함을 아셨다.

제자들에게 오니 자고 있었다. 다시 몇걸음 나가서 기도하셨다. 삼세번.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결국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가 순종하겠나이다.’가 예수님의 기도셨다.

더이상 이문제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실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을 아셨고 순종할 힘을 얻었다. 제자들에게 돌아오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고 쉬라고 하셨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셨다.

// 기도로 만에 하나 성부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런 류의 기도가 어색하다. 대신 나의 뜻을 바꾸게 하고, 육신의 연약함을 순종할 수 있는 강건함으로 바꾸는 기도에 대한 경험은 많다.

// 예수님도 육신이 약하셨다. 겟세마네까지 제자들을 동행하게 하셨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기도 장소까지 데려가셨다. 십자가에 팔리는 곳에도 함께 가자고 하셨다. 이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세상에서 담대할 수 있는 이유다.

마가복음 14:12-21

나는 아니지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열둘이 근심가운데 묻는다. 나는 아니지요? 가룟 유다도 ‘나는 아니지요’에 동참했을까? 아니라고 본다.

구원의 확신이 어디 있는가?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닐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 (고후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