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이 추구하는 복은 편함이 아닐까? 아니 1세기에도 그랬다. 바울을 태우고 가던 배의 선주와 선장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한 라새아 근처 항구 (미항) 대신 뵈닉스로 가고자 했다. 마침 남풍도 순하게 불었다. 하늘의 (바다의) 뜻인가 했다. 그러나 유라굴로라는 강풍을 만났다. 아무도 배을 제어 할 수 없었다. 그저 강풍에 쫓겨가기만 했다. 풍랑과 싸울 수 없었다. 짐도 버리고 배의 기구도 버렸지만 해도 별도 구원의 작은 빛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으나 산것이 아니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밥이 목을 넘어갈리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
바울은 평안을 전했다. 안심하라.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 것이다. 오직 배만 잃을 것이다. 내가 위로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너는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 너와 함께 항해나는 자를 다 네게 주겠다. (너와 함께 살려 주겠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안심하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편안함이 뭐길래 ‘좋은 항구’를 (미항을) 뒤로 하고 뵈닉스로 출발 했을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편안함이 뭐길래 ‘좋은 가족’, ‘좋은 직장’, ‘좋은 친구’를 떠날까? 여기서 ‘좋다’라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뜻이지만 헬라어 사전에서는 선하다, 공정하다. 정직하다. 충족하다 가치있다 더 낫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좋은’ 포도주, ‘선한’ 목자, ‘선한’ 일로 번역되었다. 하여간 아름다움이 불편함에 가려졌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편리함은 순풍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언제 광풍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좋은게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좋을 수는 있어도 바른게 아니기 때문이다. 바른 것은
생명이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 다는 결코 바른 표현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야 참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라는 말을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복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은 다르다. 예수 믿으면 생명을 받는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받은다. 불신자들도 생명에 관심있어 한다. 복음는 복받는다는 소식이 아니라, 복음은 생명을 받는다는 소식이다. 짐도 기구도 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뭐 요즘은 생명보다도 짐과 기구에 목숨거는 별 이상한 존재들도 있는 듯 하지만… 좋은 것, 바른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다.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