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1-10

슬프다.

야단 맞는 딸도 슬프겠지만 책망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쩌랴. 딸에 대한 분노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더 큰 슬픔이다. 그래도 구름으로 덮으셨다. 하나님의 임재다. 딸의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내팽개침을 당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 그렇다고 잘못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딸을 혹독하게 야단치신다. 혼낸다. 회초리도 드시고 이웃들에게 창피까지 당하게 하셨다. 금을 단련하듯 완전히 불사르셨다. 정금만 남도록.

그래도 딸을 사랑하신다. 원수에게  다 맡기지 않으시고 친히 원수 같이 되셔셔 딸을 삼키셨다. 여기서도 큰 물고기를 보내 요나를 삼키신 주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하나님은 진노가운데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일까? 딸은 슬프지만 주님은 더 더 더 슬프다. 딸에게 근심과 애통을 더하시는 이유는 정금으로 단련하시는 것이며 회개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헛된 종교적 열심도 버리게 하셨다. 종교행사도, 각종 절기들도, 심지어 주일도 잊어버리게 하셨다. 종교지도자들은 멸시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 예배당의 강대상도 팔아 버리시고 교회건물도 경매에 넘기셨다.  예배당 건물이 장마당이 되게 하셨다. 통곡의 벽이 따로 없다.

그러나 옛 영화를 기억하며 통곡하는 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고 살았던 것을 기억하며 통곡해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이 없어 하나님 말씀이 희귀하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잠히 재를 뒤집어 쓰고 베옷을 입고 주님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슬프다.

시인은 딸의 슬픔보다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오른 주님의 슬픔을 노래한다. 딸의 슬픔을 위로하실 주님의 진노는 누가 위로할 것인가? 결국은 순종하는 자리에 나아오는 딸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