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4:1-10

// 솔직히 슬프다 슬프다 또 슬프다하니 성경읽는 나도 힘들다. 그런데 이 모든 슬픔은 자초한 것이다.

금이 빛을 잃었으니 순금이 변질 되었으니 성전이 무너저 내렸다.

(소금이 맛을 잃고 소금이 변질 되면 마찬가지로 밟힐뿐이다.)

순금같던 이스라엘이 던저버리면 깨어질 질항아리가 되었다.

갓태어난 자녀들도 돌볼 능력도 없다.

혹시나 쓰레기 더미를 뒤져보지만 무엇하나 건질 수 없다.

소돔의 무너짐보다 더 큰 죄가 넘치는 성이 되어버렸다.

화려한 보석같던 모습이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되었다.

차라리 칼에 죽었더라면 대가 끊어지고 자녀를 삶아 먹는 비극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시인은 패망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탄하고 있다. 자녀를 삶아 먹는 극심한 굶주림을 언급한다. (쓰레기 매립장 같은 곳에서 사는) 자신들의 처지를 소돔의 멸망에 빗댄다. 금이 빛을 잃을 수 있듯이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성전의 돌들이 무너지듯 맛을 잃은 소금도 밟힌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말씀의 기근으로 우리의 영적 모습도 피골이 상접해 보이지는 않을까? 자녀세대에도 신령한 젖대신 곰팡이가 쓴 빵만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다. (금그릇이든 질항아리든 더러우면 쓸 수 없다.) 비참하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예배당의 벽(돌)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예레미야애가 3:55-66

시인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은 깊은 웅덩이 속이다. 요나를 삼켰던 큰 물고기 뱃속을 연상케 한다. 이 캄캄한 어둠속에서 시인은 탄식이 아니라 희망을 노래한다.

주께서 시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말라고 기도한다. 기도할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던 주님의 대답을 기억한다. (간구할 때마다) 시인의 원통함을 풀어주시고 생명을 주신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 지금의 억울함도 원통함도 풀어달라고 희망을 노래한다. (시인이 동일시 하는 주의 백성에 대한) 대적들의 모든 보복과 모해함을 주께서 아시고 보시고 들으셨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대적들의 조롱함도 주께 봐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저들의 악한 행위대로 갚아달라고 , 교만한 저들에게 저주를 내려달라고, 저들의 마지막까지 진멸해 달라고.

시인의 희망은 갇힌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죽게 된 사람들을 풀어 놓아 주시는 주님이시다. 뭇 백성이 다 모이고  뭇 나라가 함께 주님을 섬기는 하나님나라다. (시102)

시인은  bring him home 을 노래한다.

God on high, hear my prayer, in my need, you have always been there~~~~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다시 살기를 노래한다. 억울함도, 원통함도, 보복도, 모해함도, 비방도, 조롱도, (손으로 행하는) 모든 악함도, 거만도 없는 나라.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진노로 멸하신 그 나라로. Bring us home

예레미야애가 3:40-54

회개하자.

주께 나아가 기도하자.

// 회개와 기도가 주께 인자와 긍휼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인은 회개하지 않는 우리에게 멸절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신다고 애끓는 탄식의 노래를 이어간다.

주님은 범죄한 우리를 용서하지 않고

진노하셔서 우리를 죽기까지 내버려 두시고 긍휼을 감추셨다.

우리의 기도를 못들은 척하셨다.

뭇나라들도 우리를 돕지 못하게 하셨다.

오히려 우리의 대적이 되어 공격하게 하셨다.

두려움! 함정! 파멸! 멸망!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임했다.

파멸을 목격하니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른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마를새 없다.

주님이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울며 기도하리라)

성노예 신세 여인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한다.

나도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새가 되었다.

나를 함정에 넣고 돌을 던진다.

함정에 물을 채워 익사시키려고 한다. 이제 나는 멸절된다.

// 시인만 운다고 (울며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공동체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우리를) 돌아보실 때까지. 주님은 선하시다. 주의 인자와 긍휼은 무궁하시다.

 

예레미야애가 3:19-39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시인은 진멸되지 않을 소망을 노래한다. 주의 인자와 긍휼에 모든 것을 건다. 시인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주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있으면 된다. 근심 고난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고후7: 10)

잘못에 대한 벌을 달게 받되 진멸되지 아니하는 구원을 구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주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애3:19-39)

예레미야애가 3:1-18

시인은 지체로서의 정체성을 느낀다. 자신도 주님의 진노하심하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노래한다. (교회의 지체로서 내가 가져야할 태도다. 성도라면 아무도 한국교회의 현실이나, 사역 현장에서 도피할 수 없다. 어둠속에서 함께 걷는다.)

주님은 혹독하게 시인을 치신다. 건강을 잃게 하시며(4) 고생하게 하시며(5) 삶의 의미를 잃고(6) 결박당하고(7) 기도도 안되고 (8)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9) 훼방꾼을 만나고 (10) 배신당하고 아픈 몸으로 혼자버려지며 (11) 뭇매를 맞고 비난의 중심이되고 (12, 13) 결국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14) 굶주림에 쑥으로 배를 채우고 (15) 돌에 맞아 이도 부러지고 쓰레기 더미에 내동댕이 쳐지고(16) 마음의 평강 마져 없게(17) 하셨다.

시인은 자신이 복을 차버렸기 때문이라고 읊조린다. 기력도 없고 소망도 끊어졌다.

시인이 내어버린 복은 건강도 부유함도 성공도 명예도 평강도 아니다. 어느 누가 이런 복을 내다 버리랴. 이런 복을 담고 있는 하나님말씀을 내다버렸다는 의미다. 순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국교회가 어둠속에서 걷는다. 그럼 나도 어둠속에서 걷고 있다는 뜻이다. 교회 지체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주님이 나의 기도를 물리치시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아직은 빛이 남아 있다.

이 땅 캄에서는 복이 아니라 복주머니를 소개해야한다. 복만 추구하게 해서는 안된다. 쉽지 않으니 지혜를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