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화자가 되어) 운다. 얼마나 울었으면 눈물이 눈이 상하며, 애간장이 탔을까.
그리고 울라고 한다.
눈물이 강처럼 흐르도록 쉬지말고 울라고 한다. 다음세대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하라고 한다.
굶주림보다, 민족의 패망보다 주님의 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 종교지도자들이 헛된 묵시, 거짓 경고와 미혹만 본다. 자신들만 보면 좋겠는데 성도들을 헛된 묵시, 거짓 경고, 미혹으로 가르친다. 한국교회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다.
시인이 (화자가 되어) 운다. 얼마나 울었으면 눈물이 눈이 상하며, 애간장이 탔을까.
그리고 울라고 한다.
눈물이 강처럼 흐르도록 쉬지말고 울라고 한다. 다음세대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하라고 한다.
굶주림보다, 민족의 패망보다 주님의 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 종교지도자들이 헛된 묵시, 거짓 경고와 미혹만 본다. 자신들만 보면 좋겠는데 성도들을 헛된 묵시, 거짓 경고, 미혹으로 가르친다. 한국교회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다.
슬프다.
야단 맞는 딸도 슬프겠지만 책망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쩌랴. 딸에 대한 분노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더 큰 슬픔이다. 그래도 구름으로 덮으셨다. 하나님의 임재다. 딸의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내팽개침을 당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 그렇다고 잘못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딸을 혹독하게 야단치신다. 혼낸다. 회초리도 드시고 이웃들에게 창피까지 당하게 하셨다. 금을 단련하듯 완전히 불사르셨다. 정금만 남도록.
그래도 딸을 사랑하신다. 원수에게 다 맡기지 않으시고 친히 원수 같이 되셔셔 딸을 삼키셨다. 여기서도 큰 물고기를 보내 요나를 삼키신 주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하나님은 진노가운데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일까? 딸은 슬프지만 주님은 더 더 더 슬프다. 딸에게 근심과 애통을 더하시는 이유는 정금으로 단련하시는 것이며 회개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헛된 종교적 열심도 버리게 하셨다. 종교행사도, 각종 절기들도, 심지어 주일도 잊어버리게 하셨다. 종교지도자들은 멸시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 예배당의 강대상도 팔아 버리시고 교회건물도 경매에 넘기셨다. 예배당 건물이 장마당이 되게 하셨다. 통곡의 벽이 따로 없다.
그러나 옛 영화를 기억하며 통곡하는 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고 살았던 것을 기억하며 통곡해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이 없어 하나님 말씀이 희귀하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잠히 재를 뒤집어 쓰고 베옷을 입고 주님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슬프다.
시인은 딸의 슬픔보다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오른 주님의 슬픔을 노래한다. 딸의 슬픔을 위로하실 주님의 진노는 누가 위로할 것인가? 결국은 순종하는 자리에 나아오는 딸이어야 하지 않을까?
고통중에 괴롭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황폐합니다.
원수에게 넘겨져 갇혔습니다.
청년들, 처녀들에게도 소망이 없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위로할 자 없으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불결한 자가 두손 들고 기도하나 위로할 자 없습니다.
의로우신 주님께 불순종하는 다음세대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도 배신하고 지도자들도 자기 배만 채우려다 의식을 잃었습니다.
오 주님! 이 모든 내우외환은 나의 반역 불순종이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고통을 기뻐합니다.
주의 날, 모든 악을 가지고 주 앞에 서는 자들을 심판하소서.
시인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서 노래한다.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악이 심판 받는 주의 날을 바라본다. 탄식과 병든 마음만 남았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3)”라고 했다. 우리가 시인보다 나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리라 (24)”라는 후반절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하여도 주의 날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덧붙인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1).”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주의 날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애가
긴 시는 어렵다. 더군다나 긴 시의 일부부은 더 어렵다.
슬픔의 노래. 슬픈 이유는
이렇게 슬픈데도 하나님을 향해 크게 부르짖지 못하니 얼마나 슬프랴. 이게 다 내 잘못이니 어쪄랴. 기껏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밖에 달리 기도하지 못한다. 반대로 뒤집어 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삶의 기쁨을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구하지 않는다. 삼자의 위치에서 보면 슬퍼도 싸다. 그러나 나를 돌아보고,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이 슬픔이 나에게 한국교회에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시인은 이게 다 죄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하나님과의 기쁨의 교제은 어디가고 입술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호 통재라!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유씨부인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바늘이 부러졌는데도 슬퍼 조문을 지었다. 한국교회의 소문도 애가를 부르게 한다. 나의 삶은 어떤가? 누군가 조문을 부르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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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도 슬퍼도 자신의 죄때문이라는 것을 아니,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니 하나님께 감히 부르짖지도 못한다. 기껏 신음 소리라도 내어서 구한다는 것이 일용할 양식도 아니고 겨우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의 이스라엘. 나라의 찬란함도 공주로서의 화려함도 없어졌다. 옛 영화를 기억하는 것 조차도 비아냥거리가 되었다. 지도자들은 도망가고 자녀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게 다 수치를 옷에 묻히고도 씻지 않은 결과다. 금고의 보화까지 빼앗기고 길거리의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우리도 옛 영화를 기억하기 전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옷에 묻은 수치를 씻어내야 한다. 죄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말씀에 뿌리 박고 열매를 맺지 않으면, 열매 없는 가지되어 잘리우고 만다. 애가 부를 날이 멀지 않다.
예레미야보다 더 슬프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 사건으로 시작하고 바울이 로마에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친 일로 마무리 되는 사도행전 71일간의 여정이 끝났다.
ㅁ성령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이야기였다. 예수님 승천 후 남은 제자들이 하나되고, 가난한 성도와 부자 성도가 하나되고,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이 하나되고, 유대인과 사마리아 성도들이 하나되고,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이 하나되고, 비헬라인, 원주민에게까지 지경이 넓어졌다.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박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 사이에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이 있었다. 나에겐 모든 겸손과 눈물이 복음의 역동성보다 강하게 다가왔던 71일간의 여정이었다.
전혀 우월하지 않은 복음.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 핍박 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자들의 이야기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