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8:16-31

바울 일행은 로마에 들어갔다. 바울은 감옥이 아니라 군인 한명의 감호아래 셋집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바울은 피곤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울은 자신이 결박당한 이유를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하였다. 로마에 사는 유대인 유력자들은 바울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문안하였다. 다만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유대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어떤지 듣고자 하여 초청에 응하였다고 하였다.

바울과 유대인 유력자들은 날짜를 정해 다시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바울은 하루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나라를 증언하였고 구약성경말씀으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설복하였다. 당연히 바울을 가르침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도 바울의 강론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부정적) 반응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 진 줄 알라 그들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들으리라’라고 말했다.

바울은 두해동안 셋집에 머물렀다. 바울은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맞이 하여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다.

드뎌 71일의 사도행전 묵상을 마쳤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에 관한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시작하여 바울이 하나님나라를 전파한 것으로 맺는다.

예수님의 가르침부터 바울의 전파까지 하나님나라를 ,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바울의 복음전파가 뭔가 대단한 것처럼 포장되었던 인상이 싹 사라졌다. 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운다. 계획은 사람이 하여도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말씀은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듣고 행해야 한다. 보혜사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말씀을 순종할 수 있게 도와 주신다.

사도행전 28:1-15

사도행전 마지막 장이다.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구조되었다. 그 섬에는 원주민들, 즉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에게도 복음의 능력이 전해졌다.

모닥불에서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덥석 물었다. 원주민들은 바울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수근 거렸다. 그러나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바울은 멀쩡했다. 원주민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말했다. 마가복음 16장 18 절의 성취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신의 자녀가 되었으니 신이 되었다는 표현이 틀린게 아니다.

이 일로 바울은 멜리데 섬의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 집에 초청되어 보블리오의 부친을 열병과 이질로부터 고쳐 주었다. 그 섬의 다른 사람들도 바울에게 고침을 받았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 말씀만큼 중요하다.

로마로 갔다.

갑자기 드는 생각. 하나님의 뜻은 바울의 제안 처럼 미항에서 겨울을 나는 것도, 선장과 선주의 생각처럼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내는 것도 아니었을 수 있다. 주님은 순풍에 미항을 떠나게 하시고 유라굴라 광풍으로 (겨울동안) 뵈닉스에서 지체하지 않고 로마로, 로마로 배를 쫓아내셨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나 일을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이 일로 (멜리데 섬에서의 경험) 으로 비헬라인에게도 (야만, 원주민으로 번역되지만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들로 이해하면 좋다)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이 바울에게 ‘땅 끝’이 되지 않았을까? 언어적 땅 끝이다. 멀리가지 않아도 매일 경험하는 땅 끝이다.

 

 

광풍으로 곡기를 끊은지 두주가 지났다. 배는 이미 선장과 사공의 손을 떠나 바람과 물결에 이리저리 쫓겨갔다. 그래도 육지에 가까운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육지가 가깝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아는 사공들은 자신들만 살고자 거룻배로 도망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주셨다는 주의 사자의 말씀을 기억했다. 그는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배에 있는 사람들은 운명공동체임을 말했고 군사들은 거룻줄을 끊어 사공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

바울은 두주나 굶은 사람들을 먹이기로 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의지다. 구원에 대한 열망이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나눠 먹었다. 모든 사람이 안심했다. 평화다. 함께 떡을 뗀 사람의 수가 이백칠십육명이었다.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밀은 바다에 버렸다. 참 생명을 소유한 이상 살기 위해 먹을 것을 쌓아 둘 필요가 없었다. 오천명을 먹이시고 남은 열두광주리는 어디에 쓰였을까?

육지가 가까와지자 군사들은 공동운명체임을 잊어버리고 죄수들이 도망갈까하여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부장이 바울의 생명을 구원하려고 군사들의 결정을 막았다. 이방인 백부장의 생명과 바울의 생명이 하나다. 결국 이백칠십육 명 모두가 다 상륙하여 구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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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공동체에서 영향력을 가진 존재이나, 권력이나 전문적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꼭 리더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육지가 가까운 줄 알자 사공이라는 전문가들은 자신들만 살고자 했다. 바울은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주셨다는 주의 말씀을 따라 군사들이 거룻배를 끊어 버리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주 굶주린 사람들에게 떡을 떼어 먹게함으로 소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남은 밀을 버림으로 구원이 먹는것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암시했다.

또다른 전문가들, 군사들은 죄수들이 도망할까 하여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고자 군사들을 막았다. 결국 이백칠십육명 모두 구조되었다.

공생공사.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바울이든 백부장이든 주님 일을 이뤄가신다. 꼭 내가해야 한다고 주장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사도행전 27:12-26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복은 편함이 아닐까? 아니 1세기에도 그랬다. 바울을 태우고 가던 배의 선주와 선장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한 라새아 근처 항구 (미항) 대신 뵈닉스로 가고자 했다. 마침 남풍도 순하게 불었다. 하늘의 (바다의) 뜻인가 했다. 그러나 유라굴로라는 강풍을 만났다. 아무도 배을 제어 할 수 없었다. 그저 강풍에 쫓겨가기만 했다. 풍랑과 싸울 수 없었다. 짐도 버리고 배의 기구도 버렸지만 해도 별도 구원의 작은 빛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으나 산것이 아니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밥이 목을 넘어갈리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

바울은 평안을 전했다. 안심하라.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 것이다. 오직 배만 잃을 것이다. 내가 위로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너는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 너와 함께 항해나는 자를 다 네게 주겠다. (너와 함께 살려 주겠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안심하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편안함이 뭐길래 ‘좋은 항구’를 (미항을) 뒤로 하고 뵈닉스로 출발 했을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편안함이 뭐길래 ‘좋은 가족’, ‘좋은 직장’, ‘좋은 친구’를 떠날까? 여기서 ‘좋다’라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뜻이지만 헬라어 사전에서는 선하다, 공정하다. 정직하다. 충족하다 가치있다 더 낫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좋은’ 포도주,  ‘선한’ 목자, ‘선한’ 일로 번역되었다. 하여간 아름다움이 불편함에 가려졌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편리함은 순풍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언제 광풍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좋은게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좋을 수는 있어도 바른게 아니기 때문이다. 바른 것은

생명이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 다는 결코 바른 표현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야 참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라는 말을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복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은 다르다. 예수 믿으면 생명을 받는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받은다. 불신자들도 생명에 관심있어 한다. 복음는 복받는다는 소식이 아니라, 복음은 생명을 받는다는 소식이다. 짐도 기구도 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뭐 요즘은 생명보다도 짐과 기구에 목숨거는 별 이상한 존재들도 있는 듯 하지만… 좋은 것, 바른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다.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도행전 27:1-11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닷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결박당한 신분이지만 로마행 배를 탄 바울의 입에서 이런 노래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배 저배 바꿔타며 로마로 가는 길은 험한 길이었어도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이니 바울에게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죄수들과 끌려가는 신세지만 (유죄로 항소한) 다른 죄수와 달리 무죄를 상고한 것이라 인솔하는 백부장 율리오의 특혜도 받았다. 아니 9절에서는 로마행의 진짜 인솔자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배의 일정에도 관여했다.

백부장은 바울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선주와 선장을 믿고 배의 일정을 따랐다.

세상에게 우리와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는 것은 쉽지 않다. 천국행 열차를 타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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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닷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결박당한 신분이지만 로마행 배를 탄 바울의 입에서 이런 노래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배 저배 바꿔타며 로마로 가는 길은 험한 길이었어도 이년 넘게 기다린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이니 바울에게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길은 편하고 쉼의 길이 아니다. 편하고 싶으면, 쉬고 싶으면 더이상 안나가는게 상책이다. 왜냐하면 더 나아질 길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기대해서도 안된다. (너무 부정적인가) 하나님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화의 나라지만 편안하게 등따시게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 나가기가 정말로 쉽지 않다. 내가 그렇다. ㅠㅠ

찬송대신 희망의 나라로를 불러재껴본다.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성령의 바람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찬 곳 하나님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