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8:8,9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8,9)

주님은 나를 뭐라 부르실까? 그냥 내 것이라, 내 소유라고만 하셔도 감사하다. 투구요 규가 되지는 않더라도 버려지지는 않아야 한다.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시편기자를 따라 마음을 정해 노래하고 마음을 다해 찬양하리라.

시편 107:23-

주님의 인자하심을 깨달아라.

시편기자는 항해를 통해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한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광풍도 큰 파도도 주님이 일으키신다. 광풍과 큰 파도 속에서 뱃사람들은 영혼이 녹고 배멀미에 지각이 혼미해지고 고통속에 빠진다. 이때 유일한 희망은 주께 부르짖는 것이다. 주께서 간구를 들으시고 광풍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며 평온하게 목적지 항구로 인도하신다.

어렸을 때 경포 앞바다에서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 파도에 맞춰 점프를 하는 파도타기를 했다. 박자를 못맞추면 파도가 얼굴을 때렸고 짭짤한 바닷물이 콧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매워 혼났다. 그런데 튜브를 가슴에 끼고 나가면 그냥 몸을 튜브에 맡기면 그만이었다. 마냥 즐거웠다.

그러나 대양에서는 다를 것이다. 오래된 뱃사람들도 아무리 큰 배라도 파도산에 올라서거나, 파도 골짜기에 파묻히면 죽음이 엄습하는 공포에 휩싸인다고 한다. 이런 풍랑을 겪고 항구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이라고 시편기자는 노래한다. 이런 주님을 찬양하라고 노래한다.

시편 107:1-22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8,15,21)

삼세번은 중요하다는 뜻이다. 시편기자가 노래한 주님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이 무엇인가? 태평성대 (풍요와 평화)가 아니라 대적으로부터 받는 고통에서 속량을 받은 것이다. 광야 길에서 주리고 목마르고 영혼마저 피곤한 고통에서 건짐을 받고 바른 길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곤고의 쇠사슬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시편 106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거역의 백성들이 고통가운데 부르짖을 때 주님이 들으시는 것이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이요, 거역한 백성들에게 크신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 주님의 인자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의 인자는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관없이 사는 것도 아니요 권세만 주장하는 것도 아니요 탐욕으로 배부른 것도 아니요 세상법대로만 판단하는 것도 아니요 사람의 꾀로 가득한 것도 아니요 당파를 지어 잇권을 챙기는 것도 아니요 박해를 면하기 위해 공의를 피하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 인자는 잘먹고 잘사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다. 주님의 인자는 의와 희락과 화평이다. 물론 개인적이지 않다. 공동체적이다.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은  거역하는 백성들에게도 주님은 약속을, 언약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신다. 결국은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셨다. ) 우리에게는 주어진 말씀이 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20)

 

 

 

시편 106:32-48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수기의 사관은 모세를 이렇게 (민 12:3) 평가했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본다면 모세는 온유한 사람의 최고봉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았었다. 그런 모세도 결국에는 성깔을 부리고 말았다(33). 반복되는 거역에 함부로 말을 하고 만것이다.

시편기자는 주의 백성들의 거역을 “그래도 주님은 여러 번 그들을 건져주셨건만, 그들은 간악하게 항거하면서 죄악으로 자꾸만 빠져들었다.” (43 공동번역)라고 강조한다. 세상 사람들 중에 가장 온유했던 모세는 결국 실패하고 성깔을 부려, 자신도 화를 입게 되었지만 주님은 어떠하신가?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아우성 소리를 들으실 때마다 고생하는 그들에게 눈길 돌리시고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하시며 그 크신 사랑에 마음이 누그러져 그들을 잡아간 자들의 마음을 돌려 그들에게 동정을 베풀게 하셨다.” (44-46 공동번역)

그 크신 사랑에 마음이 누그러지셨다. 주님은 범죄와 죄악에 진노하신다. 심판하시고 벌을 내리신다. 그러나 주께 부르짖을 때마다 언약을 기억하신다. 파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지키시기 위해서다. 시편기자는 이런 주님을 찬양한다.

순종 못하기로 말하면 나도 이스라엘 백성 못지 않다. 이땅 사람들과 함께, 이땅 사람들의 가치관을 배우며, 이땅 사람들처럼 처세한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나에게 올무로 다가 올것이다.  오늘도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부르짖는다. 이것저것 내가 원하는 것 말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시편 106:13-15

주님의 권능과 은혜를 곧 잊어버리는 백성들.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는 백성들.(13)

찬양의 노래를 부르던게 엊그제 같은데 욕심을 크게 내며 (탐욕에 빠져) 하나님께 도전장을 내밀었다. (14)

주님께서는 그들의 몸은 살찌게 하셨으나 (요구를 들어주셨으나) 그들의 영혼은 말라비틀어지게 하셨다. (15)

요구를 들어주셨다고 다 기도응답이 아니다. 주님은 탐욕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이루게도 하신다.

피골이상접한 육체가 말라 비틀어진 영혼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 주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가,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릴 것이다.

감사 찬양이 그치는 순간 은혜도 잊어버리고 주님의 가르침도 기다리지 않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역사를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