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6:1-12

요며칠 시편기자는 역사를 노래한다. 우리는 성경 66권을 외우기 위해서 노래를 지어 부른다. 조선의 왕들을 외우기 위해 태정태세문단세를 나리나리개나리 운율에 맞춰 불렀다. 확실히 노래는 암기에도 군가처럼 공동체정신을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이 된다.

시편기자는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면서, 주의 권능을 찬양하고 선포하면서,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면서, 주의 구원과 돌보심을 자랑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이런 노래를 지어부르는 이유는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짓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의 기이한 일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않은 , 그래서 불순종한 조상임에도 불구하고 조상들을 대적에서 구원하신 그 주님의 인자와 권능에 다시 목을 매는 것이다.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들을 구해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그당시 백성들만 불러야할 노래가 아니라 자손대대로 불러야 할 노래고 우리도 불러야 할 노래다.

시편기자는 생뚱맞게 3절에 정의를 지키고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노래한다. 전체 구성상 뭔가 흐름에 맞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 복은 정의와 공의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그렇게 못산다. 주의 은혜와 인자가 필요한 이유다. 정의와 공의로 산다면 굳이 옛일을 노래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을 노래하면 될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의 은혜와 인자가 필요하다. 인생의 항해를 광야를 지나감 같이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주의 은혜와 인자를 노래하는 것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정의를 지키고 항상 공의를 행하려는 사람들이다. 주의 선하심과(은혜와) 인자를 암기하고 노래하는 자들이다.

 

 

시편 105:45

시편기자는 출애굽을 노래한다. 주님은애굽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주의 포백성을 번성하고 강하게 하셨다. 한편으로는 대적들로 하여금 주의 백성을 미워하고 종으로 착취당하게 하셨다. 주님은 모세와 아론을 보내셔서 열가지 징조를 행하시고 마침ㄴ주의 백성들을 즐겁게 출애굽하게 하셨다. 그리고 가나안을 소유하도록 인도하셨다. 왜?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45)

구원은 번성과 강함을 위함도 아니요 즐거움을 위함도 아니다. 물론 소유에 있지도 않다. 주의 율법을 지키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다.

주님은 우리가 번성하고 강하게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결국은 미움받고 착취 당하는 것보다,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나라 법을 지키고 따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번성과 강함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45절 시편기자의 결론은 모두가 잘 알지만 싫어하는 정답이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는 예수님이라는 본보기도 있고,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 할 율법은 사랑이 되었다.

그 값으로 이스라엘은 주신 법규를 따르고 가르쳐주신 법을 지켜야만 하였다. 할렐루야.(공동번역)

그 값으로! 하나님나라를 소유했으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면) ‘그 값’을 내야한다.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았으면 상속세를 내야지.)

하나님나라를 소유했으면 그값으로…

시편 105:16-22

그가 (주님께서) 그 땅에 기근이 들게하사 그들이 (하나님 대신)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백성을 기근에서 구원하고자 기근이 오기전에) 보내셨는데 (바로) 종으로 팔린 요셉이었다. 요셉은 차꼬를 차야했고 쇠사슬에 매였으나 주님은 정하신 때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요셉을 단련시키셨다.

그가 바로 왕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풀어주어 (노예에서) 자유자가 되게 하셨고 애굽을 다스리고, 살림을 주관하는 총리로 삼게 하셨다. 덕분에 요셉은 자신의 뜻대로 바로의 신하들을 다스리며, 바로의 모사들까지 가르쳤다.

스데반은 요셉의 형통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져내시고, 그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셔서, 이집트의 바로 왕에게 총애를 받게 하셨습니다. 바로는 그를 총리로 세워서, 이집트와 자기 온 집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라고 정리했다.

시편기자는 요셉의 형통을 ‘그의 (주님의) 말씀이 그를 (요셉을) 단련하였도다.’ 라고 풀어간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은총과 지혜를 주시는 통로가 ‘주님의 말씀’ 임을 또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은 부적이 아니다. 말씀으로 단련되어야 한다. 말씀으로 위로도 받지만 책망도 받는다.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형통이란 평안한 길만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론 도가니 속에서 더러움을 태우는 고통의 길이기도 하다. 주님의 말씀이 이렇게 나를 단련하신다. 이것이 형통이다.

시 105: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새번역)

“Seek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continually.” (NASB)

주님 앞에서 예배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주님의 이름에 먹칠하지도 말고 주님의 형상을 훼손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언제나 쉬지말고 항상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한눈 팔 시간이 없다.

찾고 찾아야 한다. 좇아가며 따라가며 구해야 한다. 게으른 나에게 쉽지 않다. 앉아서 구해도 되면 얼마나 편할까? 그런데 주님의 이름과 얼굴은 이웃에 있다. 앉아서 될 일이 아니다. 찾아가야 한다. 능력은 거기에 있다.

시편 104:28-30

창조주 주님은 모든 생명체를 먹여 주셔서 만족하게도 하시지만, 외면 하시어 어쩔줄 모르게도 하시고, 목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이게 보통의 삶이다. 그러나

주의 영을 받은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여, 새사람으로 주님의 뜻이 이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신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30 개역개정)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 (공동번역)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새번역)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이 땅을 (지면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바울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주의 영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이요, 따라서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이것이 지면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