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6:1-17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과 상관없이 모든 백성은) 일년에 세번 곧 무교절(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을 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주 하나님을 만나라. 빈손으로 만나지 말고 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려라.

칠칠절과  초막절을 지키라고 가르치면서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주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라고 명령한다.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한다.

15장의 면제 규정에 이어서 약속의 땅에서의 삶은 ‘언약 공동체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개인적으로 구원의 부르심을 받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단독자의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삶이다. 예수 안에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다. 계급장을 떼고 모이는 잔치다. 먼저된 자가 (큰 자) 나중되고, 나중된  (작은) 자가 먼저되는 잔치다. 다시말해 주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즐거워 하는 잔치에는 누가 높고 누가 낮음이 없는 잔치다. 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한다면 당연하다.

신명기에서 이어지는 약속의 땅에서 지켜야 하는 규례와 명령은 (지독하리 만큼) 가난한 자들을  (고아와 과부와 노비와 객) 포함시킨다. 그들을 보호하고 잔치자리에  초청한다. 그리고 함께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한다.  성도가 계급화 되어가는 교회, 지역에서 고립되는 교회가 묵상하고 배워야 할 명령이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의 의미에 갇혀서 정작 모든 사람과 함께 온전히 즐거워 하라는 사랑의 실천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면 좋겠다.

 

 

신명기 15

“매 칠년 끝에는 면제하라.”(1)
다짜고짜 뭘 면제하라는 것인지? 빚을 면제해 주라고 한다. 왜? 주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명령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면제란 무엇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앱은 ‘면제’라는 명사는 신명기에서만 딱 네번 사용되었다. ‘면제하다’라는 동사는 신명기에서 두번 그리고 다른 곳에서 6번 쓰였는데 출애굽기에서는 ‘묵혀두다’, 왕하와 시편에서는 ‘내 던지다’ 예레미야에서는 ‘손을 떼다’, 삼하와 대상에서는 소가 놀라 ‘뛰다’로 번역되었다. 복잡하다. 본문에서 그 의미을 찾으니 ‘독촉하지 말라’라는 의미다.
면제의 규례를 잘 지켜 행하면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는 다고한다. (돌려 읽으면 복을 받았으니 이 규례를 자 지켜 행라라라는 명령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중에 가난한 자가 없는 복이다.
면제 규례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가난한 형제에게 완악하게 행하지 말고, 내 것이라고 고집하지 말고, 사랑의 손을 내밀어 가난한 자들의 필요에 따라 넉넉히 꾸어주라고 명령한다. 이구절을 읽은데 고후 9장 7절 연보의 원리가 떠오르는 이유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이 가르치는 연보의 원리는 어쩌면 면제의 규례에서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면제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한다. 면제 규례를 잘 지키면 가난한 자가 없겟다는 약속을 주셨지만 면제 규정을 주셨다는 것 자체가 가난한 자들이 항상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명령이다. 약속의 땅에서 형제 중에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쳐라. 이것이 면제 규례의 핵심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들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면제의 원리는 이스라엘 백성 중 가난과 궁핍으로 노예로 팔린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면제는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노예로 부리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 받은대로 복을 나눠주어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다. 의미있는 표현은 이들의 섬김이 실제 받은 품삯의 두배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과 노동을 나눌때 노동의 가치는 자본에 비해 턱없이 낮게 책정된다. 그러나 주 하나님은 노동의 가치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곱절로 생각하신다. 말이 곱절이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면제는 ‘먹는 십일조’와 같은 원리다. 온 가족이 (남종이나 여종을 포함한) 함께 주 하나님 앞에서 먹는 것으로 이어진다. 정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이 함께 먹는다. 다만 피채 먹지 말라고 한다. 
 
면제규정도 고후 9장 연보의 원리의 핵심과 같이 가난한 성도를 돕는 것이요,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사랑의 실천이다. 주 하나님 앞에 드리지만 쓰여지는 것은 성도들을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감사하는 삶이다.
 
우리의 연보생활이 면제의 규정만큼이라도 실천되면 좋겠다.

신명기 14:22-29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22) 누구에게 드리란 말이 없다. (레위기와 민수기에 언급된 십일조는 땅(토지)를 분배받지 않은 레위지파에게 주는 것이다.) 신명기의 십일조는 다른 것인가? (성경학자들은 제2, 제 3의 십일조라고 구분한다.) 하여간 먹거리에 이어서 십일조를 언급한 것을 보면 뭔가 의미가 있어보인다.

23절에서는 ‘십일조를 드리다’라는 표현 대신 ‘십일조를 먹다’라는 표현을 쓴다. 음 그러니깐 오늘 본문의 십일조는 무엇을 먹느냐에 이어 어떻게 먹느냐에 관한 규례라고 할 수 있다. 먹거리를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한 것이 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정체성을 드러내듯이, 어떻게 먹느냐라는 십일조? 규정도 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정체성을 실천하는 규례다. 모세는 이 규례를 통해서 주 하나님 경외 하기를 항상 배우라고 (사족이 아닌) 강조한다.

십일조는 먹는 방법이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라고 가르쳤다. 모세도 십일조는 주 하나님 앞에서 (주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먹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 하나님께서 정한 곳에서 정한 방법으로 먹는다는 것은  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매년 (정해진 절기에) 주 하나님께서 정한 곳에 가서 주 하나님 앞에서 너와 가족이 함께 먹고 즐거워 하라고 한다. 주 하나님께서 정한 곳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토지 소산을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가축) 가지고 갈 수 없으면 돈으로 바꿔, 돈을 싸 가지고 주 하나님께서 정한 곳으로 가서 네 마음에 원하는 (주 하나님의 마음에가 아니라 자발성을 강조?) 모든 것을 돈으로 사서 주 하나님 앞에서 온 가족이 함께 먹고 즐거워 하라고 한다. 당연히 가족(권속)에는 남종이나 여종도 포함될 것이다. 주께서 십일조를 통해 바라시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함께 먹는 십일조 잔치에 권속외에 땅을 분배 받지 못한 레위인도 초대하라고 명한다. 특별히 매 삼년마다 십분의 일을 (십일조를) 내어 (구별하여, 꺼내놓아) 성읍에 저축하여, 분깃과 기업이 없는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과  그 성에 거주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초대해서 함께 먹으라고 (그것도 배부르게) 하신다. 그리하면 주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신다고 하신다. (신명기 행간을 흐르는 복이란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수가 많아짐)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약속의 땅에서 멸절되지 않고 사는 것을 뜻한다.)

십일조는 결국 경건한 삶이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라고 초대교회 성도들을 가르쳤다. 세속은 자기 보신을 위해 먹고 마시지만, 성도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먹고 마셔야 한다. 교회가 십일조를 교회 권속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 하는데 사용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뿐만아니라 교회가 지역사회의 가난한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삼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사용하는 지도 반성해야 한다. 십일조는 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통로다. 무슨 복! 교회가 번성하고, 성도가 교회 (하나님나라)에서 끊어지지 않고 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자자손손 이어져 가는 것이다. 이외 다른 복은 ‘진복’이 아니다. 가짜다.

 

신명기 14:1-21

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단순히 약속의 땅에 사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외형적으로는 다른 헤어 스타일과 다른 음식을 다른 방법으로 먹는 것으로 구별된다. 예를 들면 사별의 슬픔을 자해하는 것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앞머리를 빡빡 깎는 것도 아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주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백성들은 그러면 안된다고 한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거나 먹어서는 안된다. 주 하나님께서는 먹어도 되는 짐승과 물고기와 새들과, 먹지 말아야 할 짐승과 물고기와 새들을 구별해 주셨다. 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정한 것,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부정한 것이다. 이렇게 구별하는 원리는 분명하지 않다. 마치 애서와 야곱중에서 야곱을 택하신 것과 같다. 중요한 원리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에서 주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해 주셨다는 것이다. 메뉴에 없는 것은 먹지 말라는 것이다. 중국집에 가서 피짜를 시킬 수는 없다.

모세는 주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은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정한 먹거리든 부정한 먹거리든, 아니면 정한 먹거리 중에서) 먹지 말라고 하면서 그것을 성중에 거류하는 객이나 이방인에게 주거나 파는 것은 괜찮다고 덧붙인다. 다시말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정한 것이  객이나 이방인에게도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원래 정하고 부정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법인 것이다. 정하다고 구별하여 먹어도 되는 염소의 경우도 염소의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아 먹지는 말라고 하신다. 먹는 방법도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다.” (롬 14:17)  그러니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여 가르치신 사랑의 법으로는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보다 어떻게 먹고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은 개인적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다. 내 육신의 보신을 위해 먹는 것은 세상 나라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성도들과, 교회 밖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먹고 마셔야 한다.

신명기 13

12장은 주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고 가감하지 말라는 모세의 경고로 끝난다. 이제 모세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를 청종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오직 주 하나님만 청종하라고 강조한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4)

선지자나 꿈꾸는 자들은 주 하나님을 청종하는 일의 걸림돌이다. 그러니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할 예언이 있다면 ‘주 하나님께로 돌이켜, 주 하나님만 청종하라.’ 이거 하나밖에 없다. 다른 메세지는 이미 주어진 주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감하는 악이다.

가족이나 친구가 (선지자나 꿈꾸는 자여서) 다른 신을 섬기자고 꾀는 것은 죽여야 할 죄악이다. 긍휼히 여기지도 애석하게 여기지도 말고 단호하게 돌로 쳐죽여 이스라엘 중에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만약 어떤 불량배가 (선지자나 꿈꾸는 자로 행세하여) 다른 신을 섬기려는 소동이 일어난 성읍에 대한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면 그 성읍 전체를 진멸하고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도록 폐허로 만들라고 하신다. 진멸한 성읍의 재물에 손대지 말라고 하신다.

이렇게 주 하나님 대신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섬기도록 조장하는 개인이나, 미혹된 집단을 깨끗하게 진멸해야 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누리고 번성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18)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깨달았다. 하느님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셨는데 사람들은 공연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전7:29, 공동번역)

전도자의 깨달음 처럼 주 하나님과의 관계는 참 단순(정직)하다. 다만 사람들이 꾀를 내어 복잡하게(거짓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