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22) 누구에게 드리란 말이 없다. (레위기와 민수기에 언급된 십일조는 땅(토지)를 분배받지 않은 레위지파에게 주는 것이다.) 신명기의 십일조는 다른 것인가? (성경학자들은 제2, 제 3의 십일조라고 구분한다.) 하여간 먹거리에 이어서 십일조를 언급한 것을 보면 뭔가 의미가 있어보인다.
23절에서는 ‘십일조를 드리다’라는 표현 대신 ‘십일조를 먹다’라는 표현을 쓴다. 음 그러니깐 오늘 본문의 십일조는 무엇을 먹느냐에 이어 어떻게 먹느냐에 관한 규례라고 할 수 있다. 먹거리를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한 것이 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정체성을 드러내듯이, 어떻게 먹느냐라는 십일조? 규정도 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정체성을 실천하는 규례다. 모세는 이 규례를 통해서 주 하나님 경외 하기를 항상 배우라고 (사족이 아닌) 강조한다.
십일조는 먹는 방법이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라고 가르쳤다. 모세도 십일조는 주 하나님 앞에서 (주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먹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 하나님께서 정한 곳에서 정한 방법으로 먹는다는 것은 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매년 (정해진 절기에) 주 하나님께서 정한 곳에 가서 주 하나님 앞에서 너와 가족이 함께 먹고 즐거워 하라고 한다. 주 하나님께서 정한 곳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토지 소산을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가축) 가지고 갈 수 없으면 돈으로 바꿔, 돈을 싸 가지고 주 하나님께서 정한 곳으로 가서 네 마음에 원하는 (주 하나님의 마음에가 아니라 자발성을 강조?) 모든 것을 돈으로 사서 주 하나님 앞에서 온 가족이 함께 먹고 즐거워 하라고 한다. 당연히 가족(권속)에는 남종이나 여종도 포함될 것이다. 주께서 십일조를 통해 바라시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함께 먹는 십일조 잔치에 권속외에 땅을 분배 받지 못한 레위인도 초대하라고 명한다. 특별히 매 삼년마다 십분의 일을 (십일조를) 내어 (구별하여, 꺼내놓아) 성읍에 저축하여, 분깃과 기업이 없는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과 그 성에 거주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초대해서 함께 먹으라고 (그것도 배부르게) 하신다. 그리하면 주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신다고 하신다. (신명기 행간을 흐르는 복이란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수가 많아짐)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약속의 땅에서 멸절되지 않고 사는 것을 뜻한다.)
십일조는 결국 경건한 삶이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라고 초대교회 성도들을 가르쳤다. 세속은 자기 보신을 위해 먹고 마시지만, 성도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먹고 마셔야 한다. 교회가 십일조를 교회 권속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 하는데 사용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뿐만아니라 교회가 지역사회의 가난한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삼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사용하는 지도 반성해야 한다. 십일조는 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통로다. 무슨 복! 교회가 번성하고, 성도가 교회 (하나님나라)에서 끊어지지 않고 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자자손손 이어져 가는 것이다. 이외 다른 복은 ‘진복’이 아니다. 가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