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7:1-11

가나안 땅은 여러 민족, 헷,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등 일곱 족속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스라엘보다 인구도 많았고 강대한 민족들이었다. 주 하나님은 이들을 쫓아 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차지하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실제 그 땅을 차지해야 할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주 하나님 보시기에 그 당시 일곱족속은 진멸의 대상이었다. 언약의 대상도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도 아니었다. 그들과는 통혼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들이 믿는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켜서 이스라엘이 오히려 진멸될 수 있는 대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르라고 하셨다.

모세는 이스라엘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구별된) 백성이라고 주지시킨다.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속자로 삼으셨다고 한다.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시고 택하신 것은 다른 민족보다 인구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작은 민족이라서 택하신 것도 아니다.) 주 하나님께서 외모로 이스라엘을 택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조상들과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되셨다. 모세는 이것을 알라고 강설한다. 이스라엘을 주 하나님이야 말로 신실하신 하나님(신)이시다. 그러니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라. 계명을 지키면 주 하나님의 자손으로 천대까지 (영원히) 주 하나님의 상속자로 사랑을 받을 것이며, 주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삼사대가 아니라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실 것이다. 모세는 강하게 반복한다. 주 하나님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는 신(하나님)이시라고.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 주 하나님은 (가나안 일곱족속 같이) 인구의 많음이나 번성과 벙영, 강대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순종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신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가지셨다. 왜? 답하기 어렵지 않다. 약자들은 순종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약자들은 순종말고는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돈이든 가족이든 의지할 바가 없다. 비굴해 보일지 몰라도 외향적으로 순종하면 살아 남았다. 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에게는 부자도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히 작은 자가 큰 자보다 순종하기 쉬울 것이다. 하여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듣기만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 우리는 강함과 번영을 추구한다. 심지어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강함과 번영은 인구수나 국력으로 평가할지 몰라도 하나님나라는 순종에 있다고. ‘샬롬’은 하나님나라에 있다.

 

 

 

신명기 6:10-25

가나안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이다. 그 약속의 땅에 이제 들어간다. 흐르는 젖과 꿀, 그 땅과 성읍과 집들과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은 약속에 덤으로 주어진 것이다.

모세는 이 모든 것을 주신 출애굽의 주님을 삼가 잊지 말라고 교훈한다. 배은망덕하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고 섬길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한다.

율법, 명령, 규례, 법도의 정신을 다시 상기시킨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라. 주님은 질투하시는 신(하나님)이시다. 주님을 시험하려 들지 말고 명령과 증거와 법도를 지켜라. 주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한 일을 행하라. 그러면 복을 받아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자녀들이 이 율법의(규례와 증거와 법도) 뜻을 묻는다면 출애굽의 주님이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라고 답하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롬3:20)

율법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주님을 경외함으로 복을 누리는 길이며, 사는 (생명의) 길이며, 의의 길이다. 우리 주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이요, 우리가 믿음으로 따라야 할 길이다. 하나님나라를 얻기전부터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서는(사는) 길이요 자녀들에게 물려줘야할 의의 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가능한 길이다.

신명기 6:1-9

출애굽 1세대는 자기 장막에 짱박혀 하나님 음성듣기를 거부한 세대였다. 불붙은 산에서 흑암가운데 (두려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던 주님은 (두 돌판과) 모세를 통한 온유한 음성으로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았다. 그 불순종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1)

모세는 2세대들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주기 원한다. 주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4,5)

듣는다는 것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마음에 새겨 언제든지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강론할 수 있어야 한다. 당근 최고의 가르침은 본을 보이는 것이니 말씀을 듣고 삼가 그것을 부지런히 행해야 한다.

컴퓨터 바탕화면에도, 스마트폰 메인화면에도 성경구절 위젯을 깔아야 하나? 성경 필사도 해야하고. 티셔츠에도 프린트해서 입을까?

듣는다는 것은,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는 것은, 들려주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음 뜻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데 한눈팔 수 있을까?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신명기 5:22-33

산 위에서 불 구름 흑암 가운데 큰 음성으로 말씀하신 주 하나님. 도무지 친근할 수 없는 장면이다. 지금 모세의 말을 듣는 2세대들은 구름과 불 기둥으로 40년 가까이 인도받아 익숙할지 몰라도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웠던 것은 마땅하다. 주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두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주셨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던 경험이 있던 모세야 불타는 산에서 캄캄한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께 청종하지만, 백성들은 지도자들을 모세에게 보내 두려움을 고백하고,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에게 전해주면 순종 하겠다고 약속했다.

주 하나님도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두려움으로 주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령을 지켜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고 축복하시며 모세에게 백성들을 장막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모세를 붙들어 세우시고 율법을 가르치셨다. 이 율법은 약속의 땅에서 백성들이 지켜야할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2세대 백성들에게 주님의 율법을, 모든 규례와 법도를 약속위 땅에 들어가기 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사는 길이다. 복을 누리는 길이다. 약속의 땅에서 오래 오래 사는 길이다.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신 것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오셨던 것도,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복을 누리며 살라는 주님의 축복이라는 깨달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약속의 땅에서 마땅히 행할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순종하면 약속의 땅, 하나님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도 맛봐야 한다.

자신들의 장막으로 돌아가 그 두려우신 주님의 음성을 애써 외면한 조상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모세는 반복해서 율법을 가르친다. 세상 일에 얽매여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자신들의 장막에 짱박혀 결국 불평과 원망으로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죽은 자들과 무엇이 다를까?

오늘도 두려움으로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하소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게하소서.

신명기 5:11-21

세번째로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하신다. 망령은 죽은자의 영혼이니 주님을 죽은 신(하나님)인양 부르지 말라는 뜻인가 아니면 우리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 상태로 부르지 말라는 뜻일까?  망령되이는 정신나가서 하는 헛소리나 행동이니 진정성 없이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결국 주님을 망령되이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목석의 우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니 죄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편지했다. 주님의 이름은 망령으로, 망령되이 부르지 말아야 한다. 대신 성령으로 불러야 한다. 산 자,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로 불러야 한다.

네번째 안식일 계명은 출애굽 직후 돌판에 새겨진 내용을 더 풍성하게 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은 똑같이 너나 네 아들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가축이나 손님 모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여기에 남종과 여종도 너와 같이 안식하게 하라고 덧붙인다. 일을 하지 않는 것과 안식하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종들에게 안식하게 하라는 명령은, 안식일에는 주인에게는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명령이고, 주인과 종들 모두에게 주님이 주인이심을 알고 참 쉼을 누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모세는 돌판에 새겨진대로 (출애굽기) 창조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신 것을 기억하는 대신,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능력과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신 주 하나님을 기억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였다.

주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매일의 삶에 함께하신다. 우리의 신음과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창조주 하나님이 더 크고 능력있게 보일 수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출애굽의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 더 가깝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일곱 귀신을 쫓아내신 주님이 창조주 하나님보다 친근할 것이다.

네 남종과 여종도 너와 같이 안식하게 하라는 명령도, 애굽에서 종되었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종도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안식일은 주인과 종의 차별을 허무는 날이고, 그래서 육일도 서로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셨다. ‘일하지 말라’ 대신에 생명과 치유와 쉼을 나누셨다.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지말라’라는 계명을 ‘하라’라는 계명으로 완성하셨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 하시며 화목하라 하셨다. 간음하지말라는 계명은 음욕한 마음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니 (성적으로) 정결하게 살라고 하셨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가르치셨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은 (원수같은 이웃을 위해) 오히려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