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4:44-5:10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율법을 선포했다. 이 율법은 출애굽 후에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모세가 증언과 규례와 법도로 선포한 것이다. 벳브올 맞은편은 골짜기는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서 멸하고 얻은 땅이다.

//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 주님이시다.

모세는 ‘율법을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라고 선포했다. 이 율법은 호렙산에서 언약을 세우실 때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언약이 단순히 조상들과 세운 것이 아니라 여기 살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운 것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든지 가나안에 들어갈 주의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이었다고 해야 하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말씀이다.)  모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불가운데 너희와 (이스라엘 백성과)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천명한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모세가 중보자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을 뿐이다.

모세는 주님이 애굽에서 노예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신) 여호와라고 다시한번 강조한다. 주님외에는 다른 하나님들을 (신을) 네게 두지 말아라. 우리 자신을 위해 우상을 새기지 말아라. 우상에게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 말라. 너희 신 (하나님)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목석이 아닌 생명이 있는) 신(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는 자손 삼사대까지 죄값을 치르게 할 것이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영원히)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신) 여호와. 여호와(야웨)라는 이름의 신(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혹은 ‘하나님 여호와’와 동일한 의미로 굳었다. 모세가 선포한 율법의 전문을 통해 다시금 도전 받는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도 얼마나 많은 ‘우상’을 세울 수 있는지.  출애굽후 광야에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아론은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하나님)이다.’(출 34:4 새번역) 라고 했다. 심지어 35절에서는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공동번역) 라고 우상(송아지 형상)의 이름을 야훼 (하나님 여호와)라고 불렀다. 주님을 만들려고 하지 말자. 주님께 지음 받으려고 하자.

주님은 보지도, 듣지도, 먹지도,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우상이 아니시다. 말씀하시는 신(하나님)이시다.

신명기 4:32-43

창조때부터 이런 큰 일이 있었을까? 이런 일들을 들은 적이 있었을까? 모세가 말하는 이런 큰 일은 도대체 어떤 일일까?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28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세는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고 반문한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의 생존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우상들이 어찌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지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출애굽과 같은 행사를 하였느냐, 너희 하나님은 너희 목적에서 이런 일도 행하셨다. 목석의 우상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왜? 주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우리로 아무 신이나 (우상이나) 새겨서 찾는 어리석은 수고를 하지 말라고, 하나님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래서 친히 입을 열어 말씀하시고 큰 불의 형상으로 보여주셨다.

왜? 주님은 주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면서 고통을 부르짖었을 것이다. 주님은 그 신음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큰 권능으로 애굽에서 건지셨다. 그리고 시혼과 옥 두 왕이 다르시던 아모리 민족을 쫓아내시고 오늘과 같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

왜? (이제는 주의 백성들이 반응할 차례다.) 오직 주님만이 신(하나님)이시요 다른 하나님(신)이 없는 줄 알고 명심하라고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시고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사는 것은 주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주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면 주님이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 것이다.

모세는 요단 이쪽에서도 세 성읍을 구별하여 도피성으로 지정했다. 베셀은  르우벤 지파를 위하여, 길르앗 라못은 갓지파을 위하여, 바산골란은 므낫세 지파을 위하여.?

//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목석의 우상처럼 되어가는 나를 향해 오늘도 말씀하신다. 말씀을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냄새맡고 말하고 살라고.

 

신명기 4:15-31

모세는 십계명 두번째 “자기를 위하여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에 대한 강론을 한다.

(15) 주님의 형상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본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1:18)  조심해야 한다.

(16) 주님의 형상을 새겨 만들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남자와 여자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낼 수 없다. 그림자가 본체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것과 같다.

(17~19) 주님의 피조물들, 짐승, 새, 곤충, 물고기도 마찬가지다. 하늘에 달아 두신 해와 달과 별들을 경배하며 섬기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부분이 전체를 드러낼 수 없다.

(20~22) 모세는 주님이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노예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으니 (가나안에서 더이상 주님의 대리자로 너희를 지도할 수 없으니 나에게 기대하지 말고, 나의 중보만 믿지말고)

(23) 언약의 주님을 잊지 말고 주님이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만들지 말아라. 형상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24) 주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언약을 어기는 백성을 소멸시키신다.)

(25) 이 계명은 당대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지켜야 한다. 우상을 새기게 된다면 스스로 부패했다는 증거다. 그것이 곧 주님 앞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26) 우상을 새겨 만들면 가나안에 들어간다 하여도 속히 망할 것이다. 오래지나지 않아 전멸될 것이다.

(27~28) (전멸을 면한다 하여도) 겨우 적은 수만 여러 민족으로 흩어져 살아남을 것이다. 흩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만든 우상, 즉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30~31) 그러나 흩어진 곳에서라도 목석 우상이 아닌 주님을 찾는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찾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환난을 당하겠지만 결국 주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한다면 주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기기 때문에 너희를 버리지 않으시며, 너를 멸하지 않으시며, 언약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라는 계명은 우리가 주님의 피조물임을 다시금 선언한다. 우리가 새기고 만들 수 있는 그 어떤 형상으로도 주님을 가둘 수 없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는데 어떤 형상으로 주님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결국 남는 것은 언약이다. 말씀이다.

신명기 3:1-11

두번째는 바산 왕 옥이다. 옥도 시혼처럼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이스라엘에 대적했다. 여우 이스라엘 뒤에 호랑이 주님이 계시는 걸 아직 못봤다.

바산의 높고 견고한 성읍들을 진멸했다. 아모리 두 왕 시혼과 옥이 다스리던 지경을 빼앗았다. 바산 왕 옥은 롯의 자손들이 차지한 땅의 사람들(르바임 사람)처럼 거구, 거인이었다. 바산 왕 옥의 침대(혹은 관)의 사이즈가 9×4규빗이니 (4×1.8 미터정도) 키와 덩치가 상상이 안된다.

옥을 보고 한순간 당연히 쫄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 전쟁은 수의 많고 적음이나, 덩치의 크고 작음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신명기 2:26-37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24절 말씀대로 헤스본 아모리 왕 시혼부터 진멸한다. 모세는 주께서 시혼을 완강하고 완고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주께서 완강하지도 완고하지도 않은 시혼을 완악하게 바꾸셨다는 뜻이 아닐것이다. 완강하고 완고한 시혼을 그 상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는 뜻이다. 시혼은 이스라엘의 요청을 그날도 평소처럼 성깔을 부리며 거절하지 안았을까. As he is today (NASV).

시혼은 모든 백성들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대적했다. 전쟁은 주께 속한 것이다. 에서에게 세일 산지를, 롯의 후손 모압과 암몬에게 르바임을 주신 분이 주님이셨다. 시혼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신 분도 주님이시다.

[진멸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남여노소, 심지어 유아까지 진멸을 명하실 수 있을까? 노아 때처럼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셨을까? 헤스본 아모리 왕 시혼처럼 모든 백성이 악했을까? 시혼이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가 답이 될 수 있을까? 잔혹성이 아니라 정결해야 함에 초첨을 맞추지만 싸움을 대신? 하는 입장에서는 항상 찝찝함이 남아있다.나에게서도 여전히 악함을 본다. 거룩한 전쟁에 군사로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 결국은 나의 옛 본성과의 싸움이다. 주님이 앞장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