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1-25

광야는 푸른 초장도 쉴만한 물가도 아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다윗보다 먼저시편 23편을 노래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7)

주님이 목자시면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광야든, 초원이든 시냇가든. ‘함께 하셨다’ 는 것이 중요하다. 목자와 양, 주인과 종, 부모와 자녀, 왕과 백성. 이 모든 관계는 함께할 때 의미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에서와 롯의 자손들과 화평하라고 하셨다. 심지어 먹을 것도 물도 사서 먹고 마시라고 하셨다. 댓가를 치르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복은 은혜로 주어지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합당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 당연히 죄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주의 백성들이 악함으로 벌을 받았듯이 물론 저들은 자신들의 죗값을 치를 것이다. 그렇다고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안된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모세를 통해 에서와 롯의 후손 모압과 암몬을 언급하신 것은 형제애가 아니라 그들이 그 땅에 있던 덩치 큰 (강한) 원주민을 진멸시키고 그 땅을 차지했다는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헤스본 아모리 왕 시혼부터 한걸음 한걸음 나가면 된다. 호가호위할 수 있다. 아니 호가호위를 알고 하라고 하신다.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25)

그러니 내 힘인줄 착각하면 안된다.

신명기 1:34-4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36)

갈렙을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한’ 자라고 소개한다. 히브리어 사전을 보면 순종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충만하다, 가득채우다의 의미를 갖는 단어다.

다니엘서의 손가락이 나와 벽에 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떠오른다. 다니엘은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라고 해석한다. 그러니 부족함이란 불순종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낮추지 않고 하나님처럼 높아진 것이 불순종이다.

그러니 순종이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갈렙의 용기가 이해되지 않는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 충만했다. 순종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43)

악한 세대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이 뭔지 몰랐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야한다. 어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순간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어렵다. 일 자체에 집중하다보면 지금 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이기 어렵다. 일을 하다보면 내 생각대로 흘러가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매순간 귀기울여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통곡이다. 더 큰 문제는 통곡을 해도 주님이 우리 소리를 듣지 않으시고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갈렙의 순종. 갈렙은 주님의 뜻으로 자신을 온전히 채웠다.

말씀과 보혜사 성령님이 깨닫게 하신 것을 힘써 따르는 것이 순종이다.

신명기 1:19-33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0)

이 짧은 한 절에 ‘너희’ 라는 대명사를 다섯번 썼다. 새번역에서는 ‘당신들’이라고 여섯번 썼다.

“당신들 앞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시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들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신 것과 같이, 이제도 당신들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오.”

거듭해서, 명백하게 율법의 뜻풀이를 해서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자녀를 (아들을) 안아주시듯 주님이 안아서 이곳까지 오셨는데 (31)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

모세는 백성들에게 “그런데도 당신들은 아직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32)라고 말해야 했다. 이런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하나님과 계약, 언약 관계를 법으로 확인시킨다.

광야에서 주님의 법은 간단했다.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낮엔 구름, 밤엔 불을 따르는 순종이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면 정착이다.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물어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 요구되는 삶이다. 드리는 삶보다 듣는 삶.

주님의 품에 안겨서 무엇을 할꼬. 자장가도 듣고 옛날 얘기도 듣고…

신명기 1:1-18

모세는 요단 강 동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5 새번역 )

모세는 요르단 강 건너편 모압 땅에서 비로소 이 법의 뜻을 풀어 들려주었다.(공동번역)

신명기의 신 (申) 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5절의 번역처럼 설명하다 (명백히 하다, 거듭 되풀이하다, 알리다 진술하다) 풀어 들려주다라는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다. 영어 Deuteronomy (두번째 율법)의 ‘두번째’라는 번역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를 전달한다. 한글세대에게 자칫 ‘매울신’ 이나 ‘새신’으로 읽히면 곤란하겠다.

열하룻 길이었으면 굳이 다시 법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사십년 세월이 흘렀으니 법을 다시한번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모세가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는 ‘설명하기 기뻐했다 (기쁘게 설명했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모세는 ‘이 법의 뜻을 풀어 들려주었다.’

쉽게 말하면 (율)법에 대한 강해 설교요 주석을 달아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처럼,)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오경’ 이라는 하나님의 법 해설서가 필요했다. 법조문만이 아닌 역사와 해석이 곁들인, 법의 정신이 포함된 설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통하여, 지혜와 지식이 있어 인정받는 자들을 세워 나라(민족을)를 다스리는 것에 대한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법은 주어졌으나 사람은 외모로, 빈부귀천으로 체면치레로 판단한다. 여전히 손은 안으로 굽는다. 그러나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모세가 헌법재판소가 될 수 있었으나, 가나안을 앞두고 모세 자신은 요단강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법전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도 기쁜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일은 분명 기뻐서 할 일이다. 법을 집행하는 것은 마음 아프겠지만)

신명기. 거듭 가르쳐야하고 명백히 설명해야하고 기쁘게 시작해야 할 주님의 백성이 따라야 할 법. 이 시대에 맞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