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4

주 하나님은 모세가 죽기 전 모세에게 약속의 땅 구석구석 전체를 다 보게 하셨다. 약속의 땅에 건너가지는 못하지만 모세는 두 눈으로 약속의 땅을 보았다. 그리고 모압 땅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 묻혔다. 그러나 모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사한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이 친히 장례를 치러 주신 것이다.

모세는 늙어 죽은 것이 아니다. 신명기 에필로그를 기록한 기자는 모세가 죽을 때 나이가  백이십세였지만 눈도 흐리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그의 사명이 다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모세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의 덕목은 충만한 ‘지혜의 영’이다. 지혜의 영이 충만한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은 순종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더 이상 없었다. 어땠길래. 모세는 주님이 대면하여 알았던 사람이었다. 즉 모세는 주님과 대면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주님의 권능을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행한 자였다.

‘약속의 땅’. 며칠전에도 묵상? 했지만 ‘땅’이 아니라 ‘약속’이 강조되어야 한다. 주님은 모세가 죽기전에 약속의 땅 전체를 보여 주셨다. 그러니 모세는 약속이 이루어 진 것을 미리 본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천국도 마찬가지다. 들어갔는지 아닌지에 관심있다. 그러나 모세의 마지막 길은 땅이 아니라 약속을 보느냐 아니냐에 있다. 왜냐하면 들어가는 것과 보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라고 강조하신 말씀이다. 하나님나라를 보는 것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같은 뜻이다. 그러니 이 구절을 모세에게 적용한다면 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구석구석 전체를 다 보여 주셨으니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와 다름이 없다. 실제로 약속의 땅을 밟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대부분은 땅은 밟았을 지 몰라도 약속을 버리게 된다. 신명기에 흐르는 거듭되는 명령이 (신명이) 바로 약속에, 언약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닌가? 땅의 일에만 관심있으면 하늘의 일을 (약속을) 믿을 수 없다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주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다고. 구원받았다고. 그리고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다고. 약속의 땅은 구원받은 자가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땅이라고 가르쳤다. 주 하나님이 앞서가시고 함께 하시고 떠나지 않는 땅이라고 하셨다. 대신 백성들도 주 하나님을 따라가고 함께 하고 주 하나님을 떠나 목석의 우상을 섬기지 않아야 하는 땅이라고 하셨다.

모세는 이런 삶을 살았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주 하나님을 따라가고, 함께하고, 떠나지 않았다. 이런 모세는 미디안 광야든, 애굽이든, 광야든, 지금 모압 땅이든 어디에 있어도 약속, 언약의 삶을 산 것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도 그렇다. 구원받았습니까? 천국에 갈 자신 있습니까? 뭐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하는 삶이 아니다. 신자라면, 성도라면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을 것이고 자신이 없어도 (주님의 긍휼로) 천국에 갈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여도 천국에 갈 자신이 있다고 스스로 믿어도 약속을 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 다른 가치를 더 귀하게 여긴다면 약속이 없는자요, 언약백성이 아니요, 결국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실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모세보다 큰 자라고 비유하신다. 왜?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을 선포한 선지자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4:17)라는 약속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천국을 본 자다’ 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천국에 갔을까 궁금해 한다. 예수님 말씀을 따라 나는 천국 약속을 본 자는 (보았다는 것은 믿었다는 뜻이고 믿었다는 것은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간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신명기의 에필로그는 모세의 삶을 통해 땅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약속을 행하는 (바라보는) 삶이 중요함을 가르쳐 준다.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산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다. 이미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어차피 사람이 묻힐 땅은 반 평이면 족하다. 이 땅에서 내가 묻힐 자리가 어디면 어떠랴. 주님은 하나님나라에서 나를 맞아 주시는데.

신명기 33:18-29

모세의 축복이 이어진다.  (어제와 같이 간단히 적용한다면)

스블론처럼 해외투자의 번성을 (해외 선교를) 기뻐해야하며, 잇사갈처럼 내수경기를 (국내 전도를) 활성화 시켜  즐거워해야 한다. 갓처럼 새로운 투자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을 찬송하며, 공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어야 하나 주님의 공의와 율법에 따라야 한다. 단처럼 작은성과에도 만족해야 한다. 납달리처럼 주어진 은혜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아셀처럼 받은 복을 세어보며 평화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축복했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하나님(신)과 같은 신(하나님)은 달리 없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피난처가 되시고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신다. 원수는 쫓아내시고 진멸하게 하신다. 곡식과 포도주가 가득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이런 복을 받았다. 약속인데 이미 받았다라고 기록한다. 복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너희는 구원을 받았다. 주 하나님이 너희의 방패시요 너희를 돕는 분이시다. 공격할 때는 너희의 칼이 되신다. 원수들이 너희들에게 굴복할 것이다.

주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을까?

 

신명기 33:1-17

하나님의 사람 모세. 마치 야곱이 12지파를 축복하듯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아비가 된 것이다. 모세가 영적으로 낳았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지파별로 축복할 수 있는 근거는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성도로 부르셔서, 주님의 말씀을 받는 백성으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지파별로 본격적인 축복에 앞서 4절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라고 서문을 연다. 율법이 야곱, 즉 이스라엘의 기업이다. 소유라고 한다.

32장 9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기록한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주 하나님을 드러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기까지 율법이 곧 주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님의 임재와,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진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모세의 축복은 왕되신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는 축복이다. 당시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는 지파별 축복이 중요할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공동체로서의 온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축복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파의 지도자를 한자리에 모였을 때 모세는 축복을 한다.

르우벤처럼 살아남아야 하고, 유다처럼 대적을 무찔러야 하고, 레위처럼 주의 법을 가르치고 예배하며 대적을 꺾어야 하며, 베냐민처럼 보호받아야 하고, 요셉처럼 은혜를 받아 복을 누려야 한다.

성도에 따라 받은 은사와 역할이 다 다르지만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에 참여해야 한다. 비교할 필요도 없다. 다만 하나되려고 힘써야 한다. (불행히도 육적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신명기 32:34-52

모세의 노래 마지막은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때 당신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아마도 노래 전체의 결론일 것이다. 주님이 당신의 종들은 불쌍히 여기시고 불순종으로  주님의 백성에서 ‘그들’이 되어 그들의 신을 찾고, 그들의 신을 반석으로 삼는 원수들은 보복하신다. 이렇게 주님나라를 깨끗하게 하신다.

결국 모세의 노래는  ‘broken hallelujah’ 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함께 백성에게 이 노래를 모두 다 들려주였다. 우리 인생은  broken 을 뺀  할렐루야로만 장식되어질 수 없다.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을 할렐루야로 결말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노래를 마친 후 이 노래를 마음에 간직해 두고, 자녀들에게 가르쳐,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게 하라고 당부한다. 이 율법이 생명이라고 강조한다. 이 율법을 순종해야 할렐루야를  오래오래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결국은 땅이 아니라 마음이다. 노래를 가르친 후 주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아라. 그러나 약속의 땅에는 못들어 간다. 눈으로만 바라보기만 해라. 땅에 집착하면 모세는 실패자다. 그러나 모세는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주님을 대면하며 살았다. 마음에 할례를 받고 살았다. 약속의 땅을 온전히 맛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broken hallelujah 를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할렐루야를 부를 수 있다면) 그 삶은 성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모세는 성공했다. 육적 약속의 땅 가나안에는 못들어 가지만 (살아 있는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주님과의 교제가 이어진다는 뜻이다. (막 12:26,27)

사족: 요즘 즐겨부르는  Leonard Cohen  이 작사한 hallelujah 가 차디차고 상처뿐인 할렐루야를 노래한다. 처음에는 무슨 이런 할렐루야가 있을까하여 가사 없이 멜로디만 읍조렸다. 그러다 가사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우리말로 된 시도 읽기 어려운데 영어 가사라 직역도 안되고 행간을 읽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간음과 살인을 한 다윗왕도, 여색에 빠져 머리카락이 잘렸던 삼손도 결국은 할렐루야를 부를 수 밖에 없다고 노래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과거의 아픈 추억이나 잘나가던 순간들, 실연의 아픔 등 이런 모든 상황에서도 할렐루야를 불러야 한다. 하나님께서 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져도, 신자들 마져도 이웃 사랑보다는 이웃을 정죄하는 것만 배운 것 같아도,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밤이라 해도, 차디 찬 곳에 버려졌어도, 그래서 상처뿐인 삶을 살아도 할렐루야를 부를 수 있다면… 할렐루야를 부를 수 있다면 참 신앙이 아닌가? 난 코헨이 어떤 의미로 시를 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온전해서 할렐루야를 부르는 게 아니다. 주님이 온전하셔서 할렐루야를 부르며 산다.

 

신명기 32:15-33

(노래가 이어진다.)

발로 차고, 버리고, 업신여기고. 기름지고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해지자 이스라엘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취한 행동이다.

다른 신을 섬겨 주 하나님을 격노케 한다. 주 하나님 대신 목석의 우상, 알지 못하던 귀신들에게 제사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따른다. 창조주를 잊어버렸다.

주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은 미워하신다. 부모를 격노케하는 자녀라고 하신다. 패역하고 진실없는 자녀로 인해 (창피하여)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니실 수 없다.

백성들이 주 하나님 대신 우상으로 주님을 질투하고 격노케 했듯이 주님은 백성 아닌자로, 어리석은 민족으로 백성들의 분노를 일으키실 것이다.

반석을 주 하나님이 아닌, 주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 다른 곳에서 찾은 결과다. 백성에서 그냥 ‘그들’ 이 된다. 지혜없고 분별력 없는 민족이 된다. 다른 반석들도 주님보다 못한 것을 스스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저들이(다른 반석, 원수들) 자고할까하여 주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완전히 끊어지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종말을 향한 저주가 이어지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 한명에게 천명이 쫓기고 두명에게 만명이 쫓길 정도로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에서 ‘그들’로 쇠락할 것이다. 천명 만명이 떠든들 (행함과 진실함이 없으면 ) 한두명의 주장을 감당할 수 없는 사회가 된다.

불순종의 ‘그들’은 원수와 다를게 없다. 그들은 독주에 취해 비틀거리며 (세상 가치관에 휘둘려) 망할 날을 향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