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9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사는 것은 그 땅의 여러 민족을 멸절시키고 그 땅을 주 하나님께 받은 결과다. 어떻게 보면 땅을 차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결과다. 이런 가나안정복 전쟁은 자칫 목적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잘못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도피성은 이런 생명경시에 대한 경고다. 무죄하게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명하신다. 심지어 살인에 대해서도 부지중에 살인한 경우에는 보복해서는 안된다는 ‘생명중시’를 명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무죄한 피를 흘린 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에서 제하라고 명하신다.

죄에 대한 판결은 두명 이상의 증인으로 확정되고, 증인이 없는 경우 (쌍방의 주장이 다른 경우) 주 하나님 앞에 나가 제사장과 재판장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 재판장은 사건을 자세히 조사해야 할 의무가 있고 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형제에게 악을 행하려고 꾀한 자를 벌하여 공동체의 악을 제거해야 한다.

일벌백계로 공동체 중에서 악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그러니 명령과 규례들은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것이다. 법의 정신이다. 악을 제거하는데는 긍휼이 필요없다. ‘악’을 아까와해서는 안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지나친 보복으로 죄를 짓은 것을 막으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다. 때리면 맞고, 고소하면 더 배상하고, 필요이상으로 도와주고, 받을 생각없이 꾸어주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보복성 행위를 하지말고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라고 하셨다.

약속의 땅에서의 삶은 결국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삶이다. 도피성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악한 자들도 있을 것이나 주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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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이란 ‘아까와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르신들은 음식이든 물건이든 잘 버리지 못한다. 아깝기 때문이다. 차를 모는 사람은 범퍼에라도 흠이 갈까 조심한다. 범퍼의 역할이 있음에도 아깝기 때문이다. 도피성은 주 하나님께서 백성의 생명을 아깝게 여기셔서 만드신 제도다. 무죄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구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깝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악’이다. 우리 눈은 악을 긍휼여겨서는 안된다. 악을 아깝게 여겨서는 안된다. 제거해야 한다.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심정으로 제거해야 한다. 율법의 명령과 규정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계’를 주기 위함이다. 악을 제거하는 일에는 지나침이 있을 순  없겠지만, 악을 제거 한다고 무죄한 자의 생명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3:9)

예수님께 직접 배운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랑의 법은 율법보다 수준이 높다. 악을 선(복)으로 바꾸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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