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7

반복되는 ‘명령’. ‘명령’하여 이르되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뜻이다.

이 명령은 개인적이 않다. 그래서 공적으로 기록하라고 하신다. 큰 돌에 석회를 바르고 율법을 새겨 넣으라고 하신다. 돌비에라도 이렇게 율법을 기록하면 주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신다고 하신다. 율법을 기록하고 제단을 쌓고 (화려한 제단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하신다.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아도 된다. 외형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 화목제를 먹으며 주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하라고 하신다. 율법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모세와 제사장들은 돌 위에 새긴 율법이 곧 이스라엘이 주 하나님의 백성되었다는 언약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해야 한다고 명한다.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여섯 지파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여섯지파는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신다.

우상을 세우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이웃의 (집을 탐내)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근친상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살인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자는 (거짓증언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

율법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각 저주마다. 백성들은 아멘으로 답하라고 하신다.

//…

 

신명기 26

약속의 땅 집들이, 아니 땅들이. 약속의 땅 첫 소산,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한다. 이 제사는 애굽으로 내려간 때부터 노예생활 그리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내신 주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경배하는 것이었다. 이 제사는 땅을 분배 받지 못한 레위윈과 함께 거류하는 이방인들과 함께 즐거워 하는 잔치였다.

모세는 다시 한번 셋째 해 십일조를 언급한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십일조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함께 먹고 배부르게 하라는 언약 공동체 돌봄에 있다.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십일조로 먹고 배부르게 하라는 명령대로 행한 것을 주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지도 잊지도 아니한 증거라라고 한다. 이 십일조를 자신을 위하거나 부정하게 사용하지 않고 주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으니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를 간구하라고 한다.

모세는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다시한번 강조한다. 문자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지켜 행하라고 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야 말로 주 하나님을 참 신(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요, 주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청종하는 것이다.

주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주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어 주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 한다. 주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 된 것은 우리를 지은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세상에서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신다고 하셨다. 왜. 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신다.

// 주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 된다는 것 이상의 축복은 없다. 굳이 사회법을 정리하면서 셋째년 십일조를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 언약공동체를 돌아보는 것이 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의 중심이요 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의 핵심이라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

 

신명기 25

재판장은 바르게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해야 한다. 이게 법의 정신인 것은 다 안다. 그러나 팔이 안으로 굽듯이 법을 세상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 사이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도 서로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갑자기 탈곡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한다. 음. 가축에게도 권리가 있는데 하물며 노예에게랴…)

형사취수제도는 좀 긴 설명이 있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남자의 음낭을 잡는 것은 그 손을 찍어버려야 할 만큼 큰 잘못이다.

저울 눈금을 속여서는 안된다. (공정한 상거래도 장수의 방편이라고 하신다.) 저울 눈금을 속이는, 결국 형제를 속이는 모든 사람을 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

사회법을 가르치면서 아말렉이 행한 일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아말렉은 주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광야길에서 뒤쳐진 약자를 쳤던 비열한? 족속이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안식을 누리게 되면, 아말렉을 멸절시키라고 하신다. 이 명령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강조하신다. 사회법 사이에 이 명령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 그 만큼 약자에 대한, 뒤쳐진 자에 대한 공격은 큰 잘못이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은 아닐까?

구약의 법들. 수천년이 지났으니 이 법들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법의 정신은 분명하다. 정의와 공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주어졌다. 고관대작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해 정의와 공의의 저울이 기울어지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가난하고 약한자의 편에 서라!

 

 

 

신명기 24:10-22

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는 법의 정신은 가난한 자 약자를 위함이 아닐까?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말이 법이지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진 자와 힘있는 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채권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주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움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곤궁하고 가난한 사람이라면, 형제든, 객이든 학대하지 말라고 하신다. 일용직에게는 당일에 품삯을 주라고 하신다. 임금체불은 죄라고 하신다. 개인의 잘못을 가족에게 떠넘기지 말라고 하신다.

법의 정신은 정의다. 이 정의가 유전무죄 무전 유죄로 굽어져서는 안된다. 가난하고 인맥도 없는 고아, 이민지, 과부에게도 돈을 받아낼려고 재판을 질질 끌지 말라고 하신다.

한마디로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애굽 노예생활에서 속량받은 것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염두에 두는 생활, 보다 적극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생활이야 말로 모든 일에 복을 받은 통로다.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애굽에서 종되었던 때, 없었을 때, 가난했을 때, 착취 당했을 때, 콩 반쪽이라도 나눠 먹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주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하신다.

// 가진자의 권리는 제한하고 없는 자에게는 인자와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임을 또 다짐해 본다.

 

 

 

신명기 23:19-24:9

신명기 15장 면제의 규례에서는 가난한 형제에게 넉넉히 꾸어주라고 명한다. 본문은 한 발 더 나아가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한다. 이 명령에서 가장 핵심은 ‘형제’라는 단어가 아닐까? 공동체가 형제의식을 가지고 실천한다는 것은 곧 복이다. (19-20)

주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미루지 말고 갚으라고 하신다. 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분명하다. 백성 스스로 이랬다 저랬다 해서는 안된다. 입으로 약속한대로 행해야 한다.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고 하여도 주 하나님 앞에 내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21-23)

가난한 자가 부한 자의 포도원이나 곡식 밭에 들어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배불리 먹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따가지고 나오는 것, 허기 채우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의 곡식밭에서 추수하는 것은 금지 되었다. 가난한 자의 필요도 채우시며, 부한 자의 재산도 지켜주신다. 좋기는 부한 자가 가난한 자의 필요를 따라 넉넉하게 챙겨주는 것이 아닐까? (24-25)

아내가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을 경우 이혼증서를 써주고 집에서 내보내도 된다고 한다. 그 여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혼했던 전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는 말라고 하신다.  음. 어렵다. 이럴 때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바로 가자.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막10) 예수님은 이 규례가 합법을 가장한 간음의 통로로 악용된다고 보셨다.  신혼을 즐기게 하여라. 성관계는 부부관계에서만 허락하신 것이다. (1-5)

맷돌을 전당잡지 말아라. 형제를 종으로 삼거나 팔지말아라. 나병환자에 대해서도 제사장들이 가르치는 대로 해야 한다.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원리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이다.(6-9)

// 문화와 환경이 다르니 사회법을 오늘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원리는 분명하다. 수직적으로으로 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지켜야 하고, 수평적으로 형제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 나병에 대해 말하면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한다. 다시말해 율법의 적용에는 빈부귀천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법망을 피해 교묘히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하신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착취하지 말라고 하신다. 형제 관계를 주종관계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다….

// 하루 쉬었더니 리듬이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