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13-

핵심은 우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다.

성도들끼리, 형제들이 서로 누워서 침뱉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지체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믿음은 나의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다.

// 음, 우리의 대적은 무엇인가? 성도들 간의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아닌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할 이유다. 우리가 없애야 할 대적은 원수가 아니라 원수 되게 하는 enmity 다.

오늘도 쉬어가자

로마서 14:1-12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위해 죽는 자들이 아니다. 성도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은 결국 한 몸의 지체된 형제들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다.

형제들을 위해 살고 죽는 자는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업신여기지 않는다. 형제는 누구나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 누워서 침뱉지 않는다.

오늘은 쉬자

로마서 13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권세는 무엇인가? 권위와 권능으로도 번역된다. 어쩌다 권한이나 관할로 번역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권리 (고전 7:37)나 자유로 (고전 8:9) 번역되기도 한다.

권세는 통치자나 위정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물론 짐이 곧 법이나 국가였던 시대에는 동일시 할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권리’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국민들의 뜻이 모아지면 정권보다 위에 있는 권세가 된다.

그래서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것이요, 권세에 대한 불복종은 심판을 자취하는 결과늘 낳는다.

다스리는 자들은 권세 그 자체가 아니라 권세를 집행하는 관리들이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일하는 사람은) 다스리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거스리는 사람에게)는 다스리는 자가 당연히 두려움의 대상일 것이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판이 아니라 칭찬이 기다린다.

다스리는 자들, 관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선을 베푸는 자들이다. 다시말해 관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서 하나님께 권리를 위임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세상 권력자들을 사용하셔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신다.

그러나 성도들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권세들에게 (하나님께서 권세들의 정점에 계신다) 복종해야 한다.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권세를 부리는 관원들이 성실히 (힘써) 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두려워해야 하고 존경해야 할 자로 여겨야 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리라. (왜 갑자기 이 구절이 끼어 들었을까?) 그러고 보니 빚은 권세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권리에 대응하는 의무다. 다시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라는 뜻이다. 세금 내는 것은 의무다. 그리고 펀치를 날린다. 이웃사랑은 의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적용하는 방편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마치 이웃에게 대하여 무슨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하지 않는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완성이라는 것은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반영했다는 뜻이다.

말세다. 말세가 가까울 수록 이웃사랑을 해야한다.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한다. 육신을 따라 행하지 말아야 한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교회학교의 교복을 입었으면 육신을 따라 행하지 말고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권세의 정점이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단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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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권세는 무엇인가? 권위와 권능으로도 번역된다. 어쩌다 권한이나 관할로 번역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권리 (고전 7:37)나 자유로 (고전 8:9) 번역되기도 한다. 권세는 통치자나 위정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물론 짐이 곧 법이나 국가였던 시대에는 동일시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에는 ‘권리’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소위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의 권리 (자유)가 정부의 권리 (권위)보다 더 높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에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하지 않나) 그러나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권세의 정점에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알아야 한다. 집행관들에게 (관리들에게) 있는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의 지극히 작은 부분집합에 불과하다…

… 바울은 권세, 권리를 맡은 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부른다. 권세를 맡은 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권리는) ‘선’을 베푸는 것이다…

…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있다. 성도들이 (성실히) 힘써야 할 의무는 ‘이웃사랑이다.’ 빚을 갚아야 하듯 ‘이웃사랑’을 해야 한다. 그래야 법을 만족시킨다. ‘이웃사랑’은 결국 준법이다…

로마서 12:9- 21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바꿔말하면 사랑은 (거짓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고 선이다. 따라서 악을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한다. 형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는 관계다. 그것도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는 관계가 형제 관계다.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다 같은 뜻이니 삼세번 강조한다) 주를 섬기라고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를 섬기는 것이다. 이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에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긍휼하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소망 중에 즐거워 하는 삶이다. 환난 중에 참는 삶이다. 기도에 힘쓰는 삶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르려고 하는 곤고한 우리가 영을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의 지체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쓸 것을 (필요를) 공급하는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들을 손님처럼 대접해야 한다. (개인적인 교제가 없었더라도 귀하게 대접해야 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개인적으로 박해하는 자도 성도 안에 포함된 자라고 해석하고 싶다. 모르는 손님 (객)도 있고 박해하는 자도 있을 수 있으나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할 관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고 권면한다. 궁극적으로 성도들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는 관계다.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그런 관계가 아니다. 누가 더 지혜롭고 누가 더 어리석은 그런 관계도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의 지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 한다. 아무에게도 (모든 사람들에게) 육신을 따라 행하면 안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성)영을 따라 선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야 안다. 할 수 있거든 성도들은 모든 사람과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반대로 성도들간에 화평한다면 세상 사람들과도 화평할 수 있다) 더불어 화목(화평)해야 한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바울의 관심은 사랑하는 자들, 형제들, 성도들이다. 그래서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한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박해자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듯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한다. 이 작은 자에게 한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해야 한다. 원수를, 증오의 대상을 소자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이 성도들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다.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영을 따라 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삶이다. 준엄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다. 성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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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긍휼하심을 받았음에도 바울은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영을 따라 살라고 구구절절이 강권한다.영을 따라 사는 것의 다른 표현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거짓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고 선이다. 따라서 악을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형제 사랑은 물론이요 아는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과 잘 모르는 성도들도 (귀한) 손님처럼 대접해야 한다. 심지어 박해자도 원수도 (성도안에도 박해자가 있을 수 있고 원수, 즉 증오의 대상자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하라고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성도들 간에 화평한 사람들이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할 수 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누가 더 높거나 낮은 것도 아니고 누가 더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관계가 성도다.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12:1-8

그러므로 형제들아! (바울의 관심은 늘 형제들이다. 성도들이다.) 형제들은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는 거창하게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다 들먹일 필요가 없다. 그저 앞단락의 핵심 너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함을 얻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모든 자비 하심으로 형제들에게 권한다. 너희 (썩어질)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영적 예배를) 드리라. 로마서 8장의 표현으로 하면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영을 따라 살라고 권한다. 이세대를 본받지 말로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대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영을 따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은 뭔가 고상한 것이나 차원 높은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을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지은신 대로 정직하게 살지 사람이 꾀를 내지 말라는 뜻이다. (전 7:29)

부르심은 개인적이나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부르심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연합이면서, 동시에 교회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는 공동체적 부르심이다. 그래서 부르심은 다양하다. 은사도 다양하다. 일의 태도도 다양하다. 그러나 부르심의 본질은 서로 지체가 되는 것이다. 한 몸이 되는 것이다.

// 복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넘치는 긍휼하심을) 받아 누리는 것이다. 불순종으로 자격도 없으면서 긍휼하심을 입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는 것은 긍휼하심을 입었으면이라는 조건이 된다. 그래서 은혜다. 하나님의 풍요하고 심오한 자비를 받았으면 육신을 따르지 말고 영을 따라 살라고 권면하신다. 그래서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는) 경건한 삶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