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1-20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유대인에게 우선권을 주는가? 할례가 복음에 유익한가? 바울은 범사에 많으니 유대인들(표면적 유대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대답한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말씀을 신뢰하고 믿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다라고 바울은 말한다. 믿지 않는 것은 주님의 미쁘심을 폐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실하심, 미쁘심은 참되시다.

// 어릴때 아이들에게 읽어준 우화가 생각난다. 여우가 맛있는 떡을 가져왔다. 여우는 멀찍이 두 선을 그어놓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뛰면 떡을 상으로 준다고 하였다. 제일 먼저 토끼가 뛰었다. 그러나 한뼘차이로 건너지 못했다. 다른 많은 동물들이 시도했으나 두 선사이 절반도 뛰지 못했다. 모든 동물이 뛴 후 토끼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제일 멀리 뛰었으니 떡은 자기 것이라고.  여우는 고개를 저으며 상은 멀리 뛴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건너 뛴 자에게 주는 것임을 다시 확인 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가져 온 떡을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돌아갔다.

유대인은 토끼다. 1등이지만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주님의 말씀을 맡았으면서도 (믿어야 했음에도) 믿지 못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미쁘시지 않은 분이 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 의로우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가 불의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거짓이 주님을 더 참되게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아가게 하지 않는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상대적이지 않다. 복음은 상대적이지 않다. 거짓이 있어야 참됨을, 악이 있어냐 선을, 불신이 있어냐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래서 결국 답을 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토끼나 다른 동물들이나 다 건너뛰어야 할 선을 넘지 못했다고. 두 선을 뛰어 넘은 동물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두 선을 넘어야 한다는 규칙을) 깨닫는 자도, 그 규칙을 만드시 주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선언한다. 하나도 없다. 모두 입만 살아서 내가 더 멀리 뛰었느니, 혹은 다른 게임을 해야 한다느니 등등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독기를 품고 말들을 한다. 떡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기도 한다. 파멸과 비참함이 기다리는 길을 간다. 평화, 샬롬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알지 못한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들이니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이다.

복음은 무엇인가? 실력으로는 (율법의 행위로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선을 건너뛰어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죄를) 깨달음이다. 이것이 복음인 이유는 우리의 실력 (율법의 행위) 대신 다른 것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자기 실력으로 떡을 먹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복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