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정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맹세한다. 미리 정하신 자들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큰 고통이다. 바울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것 때문이다. 유대인이 미리 정하신 자들의 집합이거나 부분집합이라고 당연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골육 친척, 즉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하나님 말씀이 바울에게 걸림돌이 된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고 한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가 된다. 다시말해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자녀로 여기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 문제는 미리 정하신 것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라고 미리 정하신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을 통하여, 애서가 아니고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에 대해 우리가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모세도 하나님의 일을 (유대인에게만이 아닌 온 땅에 이 복음이 전파되게 하려고)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 긍휼하게 여기시고 완악하게 여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긍휼히 여길 자, 불쌍히 여길 자, 완악할 자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바울 마음 속에 있는 큰 고통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면서도, 약속이 아닌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따라 유대인들은 당연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유대인 골육과 친척들 때문이다. 육적 유대인들은 나름 하나님을 향해 달음박질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달음박질과 무관하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실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라는, 예정론이라는 신학적 문제을 불러온다. 그러나 바울의 논조는 확실하다. (또 요한의 글을 빌리면)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복음은 겸손한 자가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자기 백성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두렵지 않은가?
상속자는 주님과 연합한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