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신비를 (아직까지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알기 원한다. 이 신비는 진리다. 따라서 형제들아라는 부름은 유대인, 헬라인 성도들을 모두를 지칭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우선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자고하지 말고 구원의 신비를 알라고 한다. 이 신비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 다는 진리가 충만해 질 때까지 유대인 성도들 중에는 더러 우둔해 지지만 결국은 온 이스라엘 (우둔해 졌던 유대인 성도들도)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다. (완전 개인적인 해석인가?)
바울은 구약을 인용한다. 바울은 독자가 성경을 잘 안다고 전제하는 것 같다. 우리도 말씀을 잘 알아야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
우둔하게 된 이스라엘 성도들은 복음으로 하면 이방인 성도들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다. 그렇지만 택하심으로 하면 여전히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잔치에 초대 받지 못했으나)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자)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대신 강권하여 잔치에 참석한지라) 이와 같이 사람들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순종하지 아니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어 그들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긍휼을 얻기 원하신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이것이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다.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주의 마음을 알 수 도 없다. 누가 감히 주를 가르칠 수 있으랴. 누가 주께 채권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이 영원히 영광받으실 창조주이시다. 아멘
다분히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이 혼돈스러운 본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기도 하시며 준엄하시기도 하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석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면 잘리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적 이스라엘이라고 하여도 그들의 불신앙만 버린다면 접붙임을 받게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누리고 긍휼하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자르고 붙이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바울을 끊임없는 논점은 성도들은 혈육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자기 백성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접하는 자 곧 주님의 이름을 믿는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다.
복음은 불순종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로 긍휼을 얻는 것이다. 자기 백성이라도 영접하지 않으면 긍휼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고 행위도 아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정말 어렵다. 신학적으로 따지면 어렵다. 오늘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라는 것이다. 준엄하신 주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