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바꿔말하면 사랑은 (거짓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고 선이다. 따라서 악을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한다. 형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는 관계다. 그것도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는 관계가 형제 관계다.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다 같은 뜻이니 삼세번 강조한다) 주를 섬기라고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를 섬기는 것이다. 이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에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긍휼하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소망 중에 즐거워 하는 삶이다. 환난 중에 참는 삶이다. 기도에 힘쓰는 삶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르려고 하는 곤고한 우리가 영을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의 지체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쓸 것을 (필요를) 공급하는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들을 손님처럼 대접해야 한다. (개인적인 교제가 없었더라도 귀하게 대접해야 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개인적으로 박해하는 자도 성도 안에 포함된 자라고 해석하고 싶다. 모르는 손님 (객)도 있고 박해하는 자도 있을 수 있으나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할 관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고 권면한다. 궁극적으로 성도들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는 관계다.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그런 관계가 아니다. 누가 더 지혜롭고 누가 더 어리석은 그런 관계도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의 지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 한다. 아무에게도 (모든 사람들에게) 육신을 따라 행하면 안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성)영을 따라 선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야 안다. 할 수 있거든 성도들은 모든 사람과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반대로 성도들간에 화평한다면 세상 사람들과도 화평할 수 있다) 더불어 화목(화평)해야 한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바울의 관심은 사랑하는 자들, 형제들, 성도들이다. 그래서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한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박해자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듯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한다. 이 작은 자에게 한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해야 한다. 원수를, 증오의 대상을 소자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이 성도들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다.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영을 따라 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삶이다. 준엄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다. 성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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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긍휼하심을 받았음에도 바울은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영을 따라 살라고 구구절절이 강권한다.영을 따라 사는 것의 다른 표현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거짓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고 선이다. 따라서 악을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형제 사랑은 물론이요 아는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과 잘 모르는 성도들도 (귀한) 손님처럼 대접해야 한다. 심지어 박해자도 원수도 (성도안에도 박해자가 있을 수 있고 원수, 즉 증오의 대상자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하라고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성도들 간에 화평한 사람들이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할 수 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누가 더 높거나 낮은 것도 아니고 누가 더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관계가 성도다.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