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30-10:4

하나님의 미리정하심이 하나님의 긍휼로 바뀌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우리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다. 로마서에서 의와 믿음은 하나님으로 대체될 수 있다. (항상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30절 하반절은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얻었으니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라고 이해하면 쉽다.

한편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의의 법도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왜? 율법의 요구사항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다. ‘믿음 = 하나님’을 또 적용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 = 자신들의 의 (스스로 만든 신)’를 의지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본으로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건만,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건만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사 8:14, 28:16)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위 아닌 믿음은 (제사 아닌 순종은, 예수님은) 부딪칠 돌이요 걸림돌이요 거치는 바위가 되었다.  ‘그를 믿는 자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을 적용하지 못했다.

바울은 다시 ‘형제들아’라고 부른다. 바울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간구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행위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열심은 올바른 지식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해서 구원을 받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율법의 요구에 맞출 수 없지만 율법의 마침이 되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한다.

// 미리정하심에서 긍휼로 갈아 타야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다. 의의 법에서 믿음으로 갈아타야 한다.

로마서 9:19-29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복음을 이야기 하는데, 자유의지와 예정론이라는 신학적 문제를 꺼내드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신다면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모든 것이 예정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실 수 없다고 반발한다. 누가 하나님을 뜻을 거역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든다. 바울은 근본적으로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따질 권리조차 없다고 단언한다.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로 이 문제에 답한다.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따질 수 없다. 그릇을 만드는 전권은 토기장이에게 있다.

22절의 분위기는 묘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시고자 멸하기로 예정하고 만든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도 오래 참음으로 관용하신다. 마찬가지로 영광 받기로 예정하고 만든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도록 (오래 참음으로 관용) 하신다. 한마디로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 졌건,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 졌건 피조물은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도록 만들어졌다.

바울은 그릇은 우리라고 한다. 우리는 누구를 지칭할까? 사람들일까? 성도들일까?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그릇은 긍휼의 그릇만 지칭할까?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없음을 호세아의 글을 인용하여 증명한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사도 요한도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유대인들 중에도 남은 자, 소수만 구원받는다고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아는 믿음에 거하는 것이다. 믿음이 결국 하나님이다. (당신이 믿는 것이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토기장이가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지만 결국 쓰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귀하게 쓸려고 만들었어도 지져분하면 쓸 수 없고, 천하게 쓸려고 만든 그릇도 지져분 하면 쓸 수 없다. 지져분 한 그릇은 결국 귀하든 천하든 진노의 그릇이 되고 깨끗한 그릇은 결국 긍휼의 그릇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하나님의 긍휼로(사랑으로) 바뀌는 것도 당연하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나를 깨끗게 씻어 놓으셨다. (그런데도 검뎅이 위에서 오늘도 구른다.) 성령의 도우심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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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가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지만 결국 쓰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귀하게 쓸려고 만들었어도 지져분하면 쓸 수 없고, 천하게 쓸려고 만든 그릇도 지져분 하면 쓸 수 없다. 지져분 한 그릇은 결국 귀하든 천하든 진노의 그릇이 되고 깨끗한 그릇은 결국 긍휼의 그릇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을(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귀하냐 천하냐) 따지는 것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 대신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예수의 피로 깨끗한 그릇 (긍휼의 그릇)이 되어야 한다. 이마져 나의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고 복음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로마서 9:1-18

미리 정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맹세한다. 미리 정하신 자들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큰 고통이다. 바울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것 때문이다. 유대인이 미리 정하신 자들의 집합이거나 부분집합이라고 당연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골육 친척, 즉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하나님 말씀이 바울에게 걸림돌이 된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고 한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가 된다. 다시말해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자녀로 여기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 문제는 미리 정하신 것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라고 미리 정하신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을 통하여, 애서가 아니고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에 대해 우리가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모세도 하나님의 일을 (유대인에게만이 아닌 온 땅에  이 복음이 전파되게 하려고)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 긍휼하게 여기시고 완악하게 여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긍휼히 여길 자, 불쌍히 여길 자, 완악할 자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바울 마음 속에 있는 큰 고통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면서도, 약속이 아닌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따라 유대인들은 당연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유대인 골육과 친척들 때문이다. 육적 유대인들은 나름 하나님을 향해 달음박질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달음박질과 무관하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실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라는, 예정론이라는 신학적 문제을 불러온다. 그러나 바울의 논조는 확실하다. (또 요한의 글을 빌리면)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복음은 겸손한 자가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자기 백성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두렵지 않은가?

상속자는 주님과 연합한 자다.

로마서 8:31-39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하다. 성도들을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들을 상속자로 삼지 않겠느냐고 바울은 반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상속자로 택하셨는데 누가 고발할 수 있겠느냐고 따진다. 우리 성도들을 의롭다 하신 (상속자로 지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아무도 성도들을 정죄 (너는 상속자가 될 자격이 없어) 할 수 없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 변호해 주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성도들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환난도 곤고도 박해도 기근도 적신도 위험도 칼로 협박해도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들의 처지를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시편 44:22을 인용한다. 다시말하면 성도의 상황은 여전히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위협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이 땅의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을 물론이고 하늘의 일인 사망 생명 천사 (공중의) 권세자들도 우리들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능력을 가졌다 해도, 그 어떤 지위(높음)를 가졌다 해도, 그 어떤 사상(깊음)을 가졌다 해도, 피조물들은 우리 성도들을 우리 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 하나님의 계획은 성도들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성도들은 이땅에서 ‘의롭다 하시고’와 ‘영화롭게 하신다’ 사이에 살고 있다. ‘칭의’와 ‘영화’ 사이에는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난무한다. 다만 성도들은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긴다. 바울은 이 소망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확신한다. 믿음이다. 복음이다. 주님과 영원히 연합해야 할 이유다.

로마서 8:18-30

주일아침. 종아리 수포 발견. 대상포진인가 의심.

선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오직 성부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선은 곧 하나님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을 이룬다는 뜻이 된다. 헬라어 직역 해석은 ‘모든 것이 선을 이루기 위해 합력한다’ 라고 한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함께 일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선한 일을 (하나님을) 위해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셨기 때문이다. 무엇을? 바로 예수님의 죽기까지 순종하심과 부활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수님의 형상, 상징이다. 첫 열매가 (맏아들이) 되셨다. 하나님의 뜻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바로 예수의 형상대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동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

이것이 현재의 고난을 감내하는 이유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이유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를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들들이)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이 소망조차 온전히 간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기 위해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요청해야 한다. 성령께 기도를 맡겨야 한다.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릴 위해 간구하시는 것,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고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