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에게 있다.)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떠나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답하신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분명하다. 너희 대적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치실 것이다. 나 하나님이 너희를 긍휼히,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다고 하신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대항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화를 내리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바벨론 왕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벌을 거두시지 않는다. 죄 값을 치루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대로 벌하실 것이다. 성전신앙, 예루살렘신앙에 사로잡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유다 백성들이 당한 운명이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우리는 순종하는 백성들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는 것은 우리의 순종이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드기야의 기도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했다. 살고자 하느냐 그러면 나가서 항복해라. 포로로 노예로 잡혀가겠지만 말이다.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한다면 포로로 잡혀가도 분명 소망을 기대할 수 있다.)
유다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죄악과 악행을 불의한 재판이라고 하신다. 착취당하고 압박당하는 자에 대한 정의가 사라졌다. 하나님 없는 삶, 신앙이 종교화되면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간데없고, 죽은 신조, 전통만 남고 하나님은 우상화 된다. 그래서 정의가 실종된다.
세상에 항복해야 살아 남는다. 세상에 포로가 되어야 우리가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포로 취급했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430년 노예 생활보다 더 걸린다 하여도 결국 살아남는다.
지금 교회의 대적은 그냥 세상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님이시다. 교회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 불순종 때문이 아닐까? 을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의를 상실한 갑질문화의 주역이기 때문은 아닐까 반성 반성 반성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