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8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이야기를 말해준다. 시드기야 왕 사년 다섯째 달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으시고 바벨론 왕이 탈취한 성전의 모든 기구를 이년안에 되돌리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거기다가 바벨론으로 잡혀간 여호야긴과 모든 포로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예레미야는 ‘아멘’으로 화답했다. 하나냐의 예언이 성취되면 얼마나 좋으랴! 예레미야 또한 이것을 바라는 바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선지자들은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한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선지자는 그 예언의 말이 응한 후에야 참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된다.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메고 있던 멍에를 빼앗아 꺾어버렸다. 그리고 다시한번 이년안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 버리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레미야는 자기 길을 갔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냐에게 가서 바벨론의 멍에가 나무에서 쇠로 바뀔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셨다. 모든 나라가 바벨론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심지어 들짐승도 바벨론에게 주셨다고 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았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하나냐가 금년 안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선지자 하나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다 (9)”

‘바벨론에 항복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가 예레미야의 주제다. 그리고 나의 묵상은 ‘세상에 항복하라 그리하면 교회가 살리라’로 적용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끊임없이 나로 고민하게 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5)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치심은 평화를 예언하시는 것인지 환난을 예언하시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분명한가?) 확실한 것은 주님이 세상이 이기셨다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평화를 당연시 하는 교회의 태도다. 주님의 가르침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를 ‘평안하다 평안하다’로 대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교회가 주류문화인 세상에서 (혹은 교회가 주류인줄 알고) 한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서구 교회는 이미 주류문화의 자리을 잃고 말았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피)선교지에서는 당연하다. 환난을 당하고 있다. 주님은 싸우라고 하지 않으시고 담대하라고 하셨다. 소수자가 된 교회는 이제 심판자의 능력을 잃었다. 옳고 그름을 제시해도 듣는 이가 없다. 소명도 사명도 없는 사역자가 떠들면 더 그렇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옳은 것을 담대하게 행하는 것 뿐이다. 교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낼만큼 교회가 옳게 행하고 있는가?) 옳은 일을 성실하게 정직하게 (담대하게) 하는 수 밖에 없다. 기한이 찰 때까지. 그러니 여전히 교회에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