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0:1-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일러 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게 하신다. 기록은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할 날이 있다고 하신다. 굳이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무서워 떤다.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남자도 해산의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겁에 질려있다. 슬프게도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런 환난의 날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환난이 끝이 아니라고 하신다. 구원함이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리시고 포박을 끊으시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이방신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하신다.) 대신 야훼 하나님을 섬기며, 야훼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의 자손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환난 날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말아야 할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태평과 안락을 주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임마누엘이 곧 구원이다. 이방은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과 유다는 구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라고 하여도 법에 따라 징계하신다고 하신다.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 기록된 말씀은 구원의 날이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소망하라는 것이다. 읽고 또 읽어 구원의 날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구원의 날에 대한 예언은 (그동안 예레미야는 유다를 대상으로 예언했는데, 아닌가?) 이스라엘과 유다를 포함한다. 나의 종 야곱이라고 부르신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한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구원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신다.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구원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도 법에 따라 (끊이없이) 징계를 받는 존재다. 그냥 무죄방면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람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어쩌면 징계가 아닐까? 성도가 통과해야 하는 길이다. 바울은 이어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은 바로 그 상심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열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 의분이 생겼고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고 그리워하는 마음과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겼고 악을 징벌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라고 징계의 유익을 설명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예수님도 죄인임을 인정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다.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함이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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